거미 - 앞날이 없는 2200원짜리 대화, 또는 재기

2020. 4. 4.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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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마다. 우리의 경로라는 것은, 우리가 원하지도 않은 어느 한 시공간 한 점에서 출발되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꼴사나운 민들레 씨앗에 지나지 않는 여정을, 그저 그럴듯하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을, 어딘가에 다다르리라 믿기로 한 그 희망을 반영하여 경로 정도로 표현하는 데에는, 그 사람이 정처 없이 흘러 다니며 살아가다가 발견 한 마음속 목표 그 빛 한 줄기를 이유로 삼았으리라고 추측할 뿐이다. 


    "이제는, 희망이 없어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변하겠어요?"


    어린놈 입에서 나온 말이다. 이제는 그 이유마저 없단다. 아르바이트를 밤늦게까지 하는 데에 모자라서 낮에도 하나 더 뛴다지. 그래. 몸으로 스며드는 경험을 근거로, 그 희망이 사실은 환상이었다고 믿고 마는것도 당연하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본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렇다고 달리는 일을 그만두어야 하겠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자의 말은 그만두겠다는 뜻이 아니다. 기력이 다 해서 더 이상 뛰지 못하겠다는 뜻이다. 

    나는 계산대에 적당히 몸을 기대고 웃었다. 방금 산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지금 당장 돈 벌어서 본인을 위해 투자하기도 불가능한 입지에서, 기대가 무슨 가치가 있겠냐는 뜻이지?"

    "농담으로라도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 말도 안 되는 세상이 되지 않는 이상 그렇죠 뭐."



    그는 얼굴의 모든 근육들이 굳은 것처럼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설령 다들 느끼고 다들 알고 다들 깨달은 점이라 해도,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주는 건 여전히 그 자체로 위로가 된다. 보통의 때에, 사람들은 지금의 대화에 자신의 길과 방향을 되짚어 볼 각오를 가지고 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지금의 문제가 해결되길 바란다. 그래서 속풀이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이 자신의 바람을 표현할 때 해 줄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적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삶의 변화에 설령 계기가 되는 말이 지금 주어진다 하더라도, 그가 지속적인 변화를 추구하고 행동으로 옮기려면 주변 환경에 적응했었던 그 뻑뻑한 '익숙함'을, 달리 말해 일상적인 생활을, 또는 지금까지 방패처럼 변명처럼 내세워 왔던 현실의 안주를 밀어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힘든 일을 마주할 각오가 필요하기 때문에. 본인에게는 리스크가 큰 일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까지 기다려줄 수 있다면, 듣는 이는 기다려야 한다. 

    안타깝게도, 시간과 공간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시각에 잡히는 모든 현재가 한 순간에 바뀔 수 있는 때를 기다린다. 그의 가슴 주머니에 꽂힌 복권이라던가.



    "그래도 꿈을 꾸니까 한두 장 사는 거 아냐?"

    "이런 낙이라도 없으면 어떻게 살아요."



    마음이 늙은 중년 같은 소리. 단순히 흉내를 낸 것에 불과한 것이리라 믿고 그냥 넘기기로 했다. 





    거미집은 어디서든 어떻게든 만들어진다. 시작점도 다르고 공간도 다르기 때문에 첫 중심을 잡을 줄을 어떻게 자아내느냐가 집 자체의 모양에 큰 영향을 준다. 첫 수로 바둑의 무한한 가능성이 상당 부분 유한해지는 것처럼.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인식의 성장이 어느 정도 진행된 시점에서 그 첫 수를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답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새로 시작'하게 하면 된다. 

    문제는, 그 누구에게도, 다른 누군가에게 '새로 시작'을 부여할만한 권위도 능력도 가지고 있을리 없다고, 누구든 그렇게 믿어버리는 데에 있다. 그 착각은 지극히 현실적인 견해에서 오며, 그래서 사람들은 민들레 씨앗처럼 날아가고 만다.  그렇게 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정처 없이 떠도는 씨앗으로서? 아니, 그렇지 않다. 그들은 공기를 타고 정해진 방향으로 나아간다. 씨앗의 관점에서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게 되는 가능성은 무한에 가깝게 펼쳐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가능성은 이미 그 자체로 불가능한 지점이 되어 있다. 자신은 여전히 공기를 따라가고, 가능성은 지나가기 때문에. 

    언제든 새로 시작하면, 언젠가 원하는 가능성에 닿으리라. 

    세상의 시간과 공간은 이것을 기다려주지 못한다. 

    하물며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다시 새로 시작하게 해 주겠는가.



    그래서 인간은 돌연변이 같은 답을 찾았다. 

    자신의 손바닥에 남은 가능성에 자신을 틀 잡는 것.

    그것 또한 적응이라 불릴 수 있는 그 무언가이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악착같이 공부하고, 악착같이 회사에 붙어있고, 악착같이 다음 세대에 그것을 바랐다. 다음 세대는 그렇게 이전 공기에 동화된 새로운 공기에 저항할 것이고, 저항이 길을 새로 만들게 될 것이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따라갈 수 없는 사람들을 붙잡고 있는 그 족쇄로 인해 폐허는 계속 폐허로 남으리라. 

    이 폐허를 가장 오랫동안 존속시킬 수 있는 방법은, 풍화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들은 모두 폐허의 붕괴를 앞당기기 때문에. 사람들이 관성이라는 족쇄를 끊지 못하는 건 그 공포감 때문이다.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설 만큼, 자신에겐 힘도 여유도 시간도 공간도 없기 때문. 지금 내가 숨 쉬려면, 지금 눈 앞만을 봐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체력이라는 그나마 분명히 소모할 수 있는 에너지를 과용하게 된다. 그런 처지에 휘말리게 된다. 그런 틀에 맞추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잖아. 하지만 봐봐. 모두 그렇게 살아가잖아.



    … 그렇게, 지구는 구르고 굴러왔다. 그러니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저 지금에 이르기까지 빚어져 온 이 환경이란 게 정신 차리고 보니 이제는 유해한 퇴적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된 것일 뿐이니까. 인간의 역사는 그렇게 외톨이로 늙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게. 초신성 폭발로 새로 시작하지 않는 이상 그나마 가능성 있는 건 복권 말고는 없겠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예요 누나."



    점장도 자고 있을 새벽. 그는 그제서야 의자에 털썩 앉고는 부은 다리를 주무르며 입가를 비뚤으며 웃었다. 

    이 모습은 두 세기 전에도 봤던 모습이니, 역시 사람 사는 모습은 근본적으로 변하는 게 없다. 그래. 그 때에도 이웃들은 자신들이 다른 이웃들을 도울수 있는 여력이 턱없이 부족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 생활이 망가지면 인간도 망가지는 그 관계성은 돌고 돌며 깊어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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