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文]/[다리-TN]

G와 M의 낮잠. 나, 소녀 G는 오늘도 M을 만나러 사뿐사뿐 걸어갑니다. 발끝을 스치는 싱그러운 풀들에서 사르르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가 끊길 때에 발걸음을 멈추어 고개를 돌리면 언제나 그곳엔 공원의 입구가 보이지요. 어둑한 나무의 그림자와 그 나무들의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을 바라보며 나는 발을 옮깁니다. 지저귀는 새의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가, 나의 길을 앞서 갑니다. 나는 저 맞은편 하얗게 보이는 너머로 서서히 다가갑니다. 이내 그 하얀 빛에서 하늘같이 파란 물을 뿜는 분수를 만나게 됩니다. 나는 그 분수의 끝자락을 바라봅니다. 주위를 두리번 거려보면 벤치에 앉아 눈을 감은채 자고 있는 남자 M을 만나게 됩니다. 반곱슬머리를 적당히 길러놓은 머리는 볼때마다 묶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됩니다. 하..

날씨는 점점 뜨거워지고, 주변의 공기가 새하얗게 데워져 아지랑이가 피어 올라오는 것을 맨 눈으로 보노라면, 어김없이 선선한 바람을 타고 소녀가 등장한다. 물론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소녀가 서 있다는 뜻이지, 정말로 바람을 타고 날아온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스크림 사줄거야?" 대뜸 소녀 G가 말했다. 대형마트에 들어가는 것을 그렇게나 싫어하던 소녀는 저번에 내가 무사히 들어갔다 나온 이후로는 조금 경계심이 사라진 것 같다. 물론 스스로 들어가지는 않지만 적어도 내가 물건을 사러 가는 것에 대해서는 극심하게 화를 내지는 않고 있다. 비록 얼마 전부터 있게된 아주 약간의 변화일 뿐이지만. "아이스크림?" "나 그 단팥 좋아해. 아이스크림도 먹고 단팥도 먹어서 이익 보는 기분이야." 게다가 설탕이 안 들어갔..

"겨울이야." 차가운 공기는 진작부터 서성이던 어느 12월. 소녀 G는 또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다. 나는 말했다. "달력상 진작부터 겨울이었어.""하지만 눈이 안내렸잖아. 눈이 내려야 진정한 겨울이라 할 수 있는거야." 나무의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고, 길에 쌓이던 눈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탓에 미끄럽게 눌려버려 총총걸음을 걷게 만드는 장본인이 되어버린 현실이 비로소 겨울이라고 말하는 그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잉어빵을 먹으면서 같은 공기 속에서 같은 정면 분수대만 바라보던 우리는 그렇게 생각도 같아져 가고 있었다. "그렇군. 눈이 있어야 겨울이군.""응.""그럼 봄은?""봄은.. 대학 등록금 고지서?""...너무 현실적이라서 슬픈데.." 그리고 이쯤에서 생각이 나뉘어 지는군. 시린 공기가..

소녀가 말했다. "마음을 다 한다면 산도 움직일 수 있고 바다도 말릴 수 있대." 꽤나 서늘해진 가을이다. 아니, 가을도 이제 옷단장을 다 한건지 슬슬 떠나려 하는 것 같다. 그런 낙엽진 길을 걷는 나와 소녀는 조용히 그것들을 밟아 나아갔다.소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뭐든지 할 수 있다 생각하면 되는거야.""그렇구먼. 아.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 난 고개를 끄덕였고 소녀도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말에 자신이 납득 한 것일까.내가 말했다. "그럼, 마음을 다 해서 산을 움직일 수 있으면…, 다른 일은 무척 쉽겠네?""하나를 알면 둘을 깨닫는구나." 소녀가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발걸음이 가벼워진건지 점점 빨리 걷기 시작한다.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마음을 다하면──" 하늘은 새 파랗고 구름..

"어떤게 좋은걸까..." 나는 소녀에게 물었다. 이따금씩 시원한 바람이 덩어리째로 불어와 머리를 흩날렸다. 감흥도 없던 오뎅국물이 생각나는 계절이 다가온 건 꽤나 전부터인데, 새삼 다시 느끼게 되는건 아이러니 하다. "무슨 소리야?" 소녀가 다시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들렀던 악기점에 일렉 기타 말이야. 하나 사고 싶은데 뭘 고를까 싶어서." "애도 아니고. 사고나서 흥미 떨어져서 금방 구석에 쳐넣는거 아냐?" "비싸서라도 그렇게는 안할걸.." 우물우물 붕어빵을 씹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확신있게 대답하지 못한 건, 우리집에 이미 비싸지만 먼지가 쌓여가고 있는 전기 오븐이 있기 때문이다. 난 이미 전과가 있는게야. 어쩌지. "...뭐.." 나는 말했다. "됐어. 괜찮아." "뭐가?..

그다지 아팠던 건 아니고, 그냥 뭐, 가끔씩은 집에 있고 싶어질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성으로, 나라는 사람은 이렇게 집에서 편하게 쉬었던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서도, G의 눈빛은 마치 사달라는 것을 사 주지 않은 탓에 삐쳐버린 어린아이들의 곁눈질 같이 뾰루퉁해 있었다. 아니, 조금 더 정리해서 잘 이야기 해 보자면, 뜻하고자 했던 어떤 일을 계획이나 하고 있었던 어린 아이가 하나 있는데, 안타깝게도 이 아이는 어느 한 어른의 이기적인 무언가 때문에 피해를 입은 탓에, 그 어른에 대하여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모습을 얼굴과 어깨와 다리와 눈빛으로 온갖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 이 상태 그대로를 설명한 것이다. 어느것도 아니고, 그대로. 하지만 ..

소녀가 이동한 곳은 다리였다. 옆 마을과 잇고 있는 짧은 다리. 그러나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곳. 소녀는 이곳에 와서 노을에 어두워진 내천 아래를 바라보았다. 예전엔 이곳에서 낚시도 했었는데. 만화에서처럼 장화를 낚아 보고 싶었거든.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런 일은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 않아도 매일이 재미있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왜 하나도 즐겁지 않을까. 바람이 선선하게. 눈가를 스쳐지나가는 그 바람결에 그리움을 담고 보냈다. 소녀의 오늘 하루는 그렇게 조용하고 지루하게 흘러갔다. 내일은 그를 볼 수 있을까.

노을이 지는 어느 날 오후. 시간은 5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소녀 G는 그를 만나지 못한 채 공원 옆 놀이터에 있는 외로운 그네를 타고 있었다. 평소같았으면 활기차게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탔겠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흥이 나지 않는다. 언제나 옆에 있어주었던 M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공원 주변을 걸어다니며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오늘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발로 살짝 밀어가며 조용히 그네를 타는 소녀는 침울했다. M이 나타나지 않아 심심했다. 심심했고, 조용했다. 예전엔 이런것도 괜찮았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이 조금 싫다. 노을이 지는 어느 날 오후. 우울하게 들려오는 까마귀 소리. 적막함이 너무하다. 이런 날도 있다. 그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싫다. 알고 있어도 싫은걸 어떡해..

사람을 아프게 하는 곳. 그녀는 그곳을 그리 불렀다. 하염없이 의욕 없는 눈빛만으로는 소녀의 생각을 단 10%도 읽을 수 없다는걸 잘 알고 있는 나는 일단 분위기의 흐름에 따라 물어보리고 했다. "아프게 한다니?" "무척 위험한 곳이야, 거긴." 시선을 아래로 꽂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의 손엔 어느새 다 먹고 앙상하게 남아있는 나무 막대기만 들려있었다. 나는 그 막대기를 받아서 가지고 있던 봉지에 담았다. 하지만 그러면서 소녀가 이을 다음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녀의 입술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소녀가 말했다. "...아니, 사실 사람만 아프게 하는 곳이라고 할 수는 없어. 그래. 거긴 땅을 아프게 해." "땅을?" "그것도 암덩어리처럼." 진지한 말과, 미소가 걸려 있지 않은 얼굴이 그녀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