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 지겹고 처절한 변곡점

2020. 3. 14.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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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주가 술 한 잔 따라주겠다며 병을 조심스레 들었지만, 이우중씨는 그 술잔에 가득 담긴 머뭇거림을 비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금만 더 속끓어야 하지 않는가. 나는 무슨 자격으로 슬픔을 털어내려 하는가. 편의점의 차가운 형광등빛이 새까만 골목길에서 빛났다.

종이컵 시울 끝까지 고여있는 술도, 그 술잔도 빛났다. 반짝였다. 눈이 젖어갔다.



    별처럼 눈부신 술방울을 흘려가며 잔을 들고, 반 모금을 홀짝였다. 남은 건 바닥에 촥 뿌렸다. 혀뿌리 끝까지 퍼지는 쓴 기운이 가셔지기도 전에, 두 손으로 술잔을 내밀었다.

   비스듬한 그늘로 얼굴이 반 가려진 지주의 입가가 비뚤어지게 웃고 있었다. 이씨도 애써 구겨지는 눈썹을 참았다.

    경련을 부르는 괴로움. 참자. 참아. 최루제 앞에 뜨고 있는 눈처럼 마시는대로 다 쏟고말 것이다.

   

   쉬는걸 바라지는 않을테니, 적어도 숨만이라도 좀 쉬자. 이제 좀.



   그 한 줄의 일기를 적기를 결심한 후로, 이중우씨의 되돌아간 홀로서기는 또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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