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 지겹고 처절한 변곡점
2020. 3. 14. 23:31
반응형
지주가 술 한 잔 따라주겠다며 병을 조심스레 들었지만, 이우중씨는 그 술잔에 가득 담긴 머뭇거림을 비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금만 더 속끓어야 하지 않는가. 나는 무슨 자격으로 슬픔을 털어내려 하는가. 편의점의 차가운 형광등빛이 새까만 골목길에서 빛났다.
종이컵 시울 끝까지 고여있는 술도, 그 술잔도 빛났다. 반짝였다. 눈이 젖어갔다.
별처럼 눈부신 술방울을 흘려가며 잔을 들고, 반 모금을 홀짝였다. 남은 건 바닥에 촥 뿌렸다. 혀뿌리 끝까지 퍼지는 쓴 기운이 가셔지기도 전에, 두 손으로 술잔을 내밀었다.
비스듬한 그늘로 얼굴이 반 가려진 지주의 입가가 비뚤어지게 웃고 있었다. 이씨도 애써 구겨지는 눈썹을 참았다.
경련을 부르는 괴로움. 참자. 참아. 최루제 앞에 뜨고 있는 눈처럼 마시는대로 다 쏟고말 것이다.
쉬는걸 바라지는 않을테니, 적어도 숨만이라도 좀 쉬자. 이제 좀.
그 한 줄의 일기를 적기를 결심한 후로, 이중우씨의 되돌아간 홀로서기는 또다시 시작되었다.
반응형
LIST
'문[文] > 거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미 - 편지, 1914년. (0) | 2020.04.05 |
---|---|
거미 - 앞날이 없는 2200원짜리 대화, 또는 재기 (0) | 2020.04.04 |
거미 - 1,300 (0) | 2020.01.18 |
거미 - 48년 묵은 하얀 자책 (0) | 2019.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