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 편지, 1914년.

2020. 4. 5.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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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독(尺牘)을 받는 기분이 어떠십니까?
    친애하는 나의 벗, 나의 벗.
    당신은 나의 이 편지를 받아야 합니다.

    당신의 정원에 스치듯 부는 바람에, 이제 더는 꽃내음이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들꽃은 늘어만 가는데도, 관리인이 없어서인지 빛나는 건 없군요.
    하지만, 당신이 만들어 놓은 이 정원의 터는 당분간 더 이 형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겠지요.

    매마른 동공이 흔들리고 흠뻑 젖은 눈가가 새빨개져 가는데도, 당신은 그 무너지는 정원과 유형물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게지요. 형태 없이 불타오르는 인간의 감정이란 그렇게나 악의를 뿜어내었고, 당신은 무력한 자신의 두 손으로 본인의 눈을 가리는 수 밖에는 없었겠지요.

    이 모든 일들에, 나는, 당신에게 그 어떤 것도 해 줄수 없었던 것에 참담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그 누구도 도울수 없을 때에도 나만은 당신에게 힘을 줄 수 있었겠지요, 도울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내게서 그러한 것들을 원하지 않았죠. 어쩜 그럴 수 있는지.
    당신이, 그러는 중에도 나를 돌보다니. 얼마나 바보같았는지. 나는 분했습니다. 당신에게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에게 힘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 
    나는 당신이 나를 친구로 불러주었을 때, 당신의 가족들 앞에서 나를 친구로 소개하고, 함께 저녁을 먹고, 다음날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좋은 추억을 남겨주었을 때, 또다시 정처없이 - 그저 그렇듯이 - 차가워져만 갔던 마음이 따뜻해져가는 걸 느끼며, 인정이, 이렇게나 간단하게 인정이 마음에 체온을 나누어 주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기로 마음먹게 되었지요.
   당신은 내게 무척이나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런 당신을 돕지 못한 나 자신이 너무도 밉지만, 염치 불고하고 나는 당신의 친구로 불리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그 이름이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과 당신의 가족으로부터 그 따뜻함을 배웠기 때문에. 

    그 따뜻한 마음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과 당신들의 역사를 짓밟는 사람들 앞에서까지 빛나는 모습을 보며, 내 마음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낀 바 있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정이 많고, 사랑 많은, 바보같은 사람. 
    그저, 무너져가는 당신들의 역사의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자신의 두 눈을 가리며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던, 이 바보같은 사람.
    나는 그런 당신을 잊지 않으리라고 각오했지요. 절대 잊지 않기로 했어요.


    그런 마음같은 건 사실 아무런 의미 없을 만큼, 나는 당신에게 내 벗 나의 친구라고 몇 천번 몇 만번 불리고 싶었습니다.
    그러지 말라고, 그렇게나 말했는데.


    그들에게는 결코, 그때의 일을 후회하면서 괴로움 속에서 몸부림치는 날 따윈 없겠지요. 그럴만한 사람이었다면, 절규하는 당신을 향해 비웃거나 하지 않았겠지요.
    제 아무리, 그러한 신념이라 하더라도. 

    내 사람. 나의 친구. 
    나는 당신의 인생에서 내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나는 당신이 내 인생에서 잊혀지지 않는 보석과 같은 사람으로서 기억될 미래에 감사합니다. 



    영원 무궁토록, 잊혀지지 않을 당신을 위해.
    친구인 당신에게 쓰는 이 편지를 책과 함께 보냅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당신이 나를 의지해 주지 않은 것만은, 좀처럼 용서할 수 없어요. 당신이 그런 탓에 나는 당신을 지킬 수 없었잖아요.

   

    



    1914. 12. 4
    이름 없는 벌레


 

 

 

   0000. 00. 00

    언젠가 해 왔던 일들에 후회하게 되었을 때, 그제서야 불 탔던 화상 자국을 보며 아프다 울부짖을 때.

    그럼에도, 벗은 계속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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