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文]/단문


2017.08.09 요즘 진척이 있습니까? -하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운 주변 소리와는 다른 공허한 머릿속이 와장창 깨지듯 정신이 돌아왔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물었다. "아, 저기, 죄송해요. 제가 말씀하신 걸 제대로 못 들어서." 아뇨, 제대로 들으셨어요. 들으신 대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 말을 커피 홀짝이면서 말하더라. 내가 들은 거라고는 요즘 진척 있냐는 물음뿐이었는데, 들은 내용을 아무리 되새김 해 봐도 주어가 무엇인지 떠올릴 수 없었다. "글쎄요." 그렇군요,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말했다. 머리를 긁었다. 공허한 머릿속, 이라고 표현은 했다만. 사실 그런 머릿속은 오히려 공상으로 가득 찬 상태가 아닐까.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대화의 흐름도 끊어놓고, 사회생활 아주 잘하고 있구나 나는..

수치심과 죄의식의 구분은 기본적으로 '누구를 더 의식하는가'로 판단할 수 있다. 죄의식의 문화 - 개인주의 문화의 특징. - 자신이 저지른 일을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지와는 상관 없이 본인이 느끼는 감정으로 자신의 '죄'를 판단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내재된 양심에 위배되는 행위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으로, 내면적인 현상이다. - 자존심이 중요한 만큼, '죄의식'을 느낄 때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 - 따라서 자신이 잘못한 죄에 대하여 사과하기 쉬움. 수치심의 문화 - 집단주의 문화의 특징. 사회적이다. - 나 자신이 규칙을 위반했는지보다는, 내 잘못을 다른사람이 알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다른 사람이 모르면 수치심을 느끼기 매우 어렵거나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외면적인 현상이다. - 체면은..

펑펑 울것 같던 하루가 지났다고 생각 했는데, 아직 밤 10시도 되지 않았다. 눈을 팟 떴을 땐 온통 어둠 뿐이었다. 5시 쯤에 자기 시작했으니까, 5시간도 채 자지 못한 것이다. 사실, 이대로 가다가는 온 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와르르 무너지는 내 몸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물론 비현실적이니까. 웃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른 시간이지만 거실도 어두웠다. 보이지도 않는데 주위를 두이번 거리다가 비로소 깨달았다. 이젠 나 혼자 뿐이다. 방 하나에 거실 겸 부엌이 있는 집에, 나 홀로 이런 방을 맞이한지 어느덧 열흘이 넘어간다. 달이 기울며, 나는 지쳐간다. 이젠 그 어느것도 미련으로 남아있지 않다. 엄마와 아빠가 법적으로 날 버린 것이 법적으로 인정된 그 날부터, 인생사──── 이젠 아무렴 어떤가..

'정신 질환자'라 칭해졌던 어떤 범죄자가 [이번] 사건을 일으켰을 때, '정신병자에 의한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그 주장에 대립되는 어떤 이들의 세력 만큼이나 강하게 일어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상황에, '정신적 질환을 가진' 다른 한 사람이 나타나서는 이처럼 말했다. 나는 약도 먹고 일반 사람처럼 살기 위해 노력한다. 이번 사건의 범죄자가 '그가 정신병자라서 죽였다'고 말하는 것은 정신병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말하는 것과 같다. 난 안 그런다. 정확한 워딩은 찾을 수 없어서 링크를 걸 수 없었다. 이 상황을 보며,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 사용해야 할 이른바 '정확한 표현'들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게 되면, 문제의 본질과는 관련이 없는 '무고한 사람'들까지도 억울하게 모두 한 통속으..

물러서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때가 있었어. ……라고, 세실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은 뒤에 간단하게 식탁 위를 정리하고 차를 마시던 중이었다. 분위기 좋은 촛불로만 식탁 위를 비추었고, 우리는 그렇게 두시간을 이야기 한 것 같다. 이윽고 밤이 되어 창가 너머 밤 하늘이 별빛을 흔들고 있을 때, 차게 식은 차를 미뤄놓고 새로 잔에 따르려 할 때, 세실의 잔에도 따라 주고 있을 때에 그가 입을 열었던 것이다. 나는 잠시 주전자를 들었다가, 다시 따랐다. 잠시 정신이 몽롱했다. 오늘 하루는 매우 바빠 지쳤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야, 그게?" "음. 그러니까……." 그가 잠시 생각을 더듬었다. 문득 내뱉은 말이었던 것이리라.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말하고 싶었던 대로 말했던 것이..

세실이 새벽에 잠에 깨어 끙끙 앓을 때마다 나는 일어나지 않은 척 하며 그의 신음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운다. 조금이라도 그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곧바로 일어나 튀어나가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그럴 수 없는데, 만약 지금 일어나 어설프게 그를 도우려 한다면 그는 그 다음날부터 자신의 괴로움을 이 새벽녘에도 숨기고 말것이다. 자신이 혼자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아무도 없는 곳에서 쓸쓸하게 고통스러움을 표현할 것이다. 내가 자고있을 때에도 내게 보이고싶지 않아 나를 경계할 것이다.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이 짖눌림이 호흡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누구에게도 보이려 하지 않으니 누구도 그를 알아줄 수 없다. 나는 오늘도 그를 알아간다. 그와 나 사이에 있는 투명한 ..

빵집에서 간단한 간식거리를 사고는 집으로 들어와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몫을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차가울 때 먹으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일단 그늘이 있는 서늘한 곳으로 다시 옮겨두었다가, 하지만 여기는 너무 지저분한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그대로 2층 내 방까지 모두 가져오고야 말았다. 커다란 난로의 영향을 피해야 한다. 문을 열자, 세실이 창가에 놓은 둥근 테이블에 팔을 올려두고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부드러운 바람이 얇은 커텐과 그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오랜만에 맑고 밝은 날씨였다. 여전히 그는 빛이 났다. "어서 와." 더글러스가 고개를 들었다. 미미하게 남은듯한 입가의 미소를 난 놓치지 않았다. 나도 웃으며 다녀왔어, 하고 인사했다. 난로에 불은 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