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文]/단문

새벽에 머리를 긁으며 헤드셋을 내려놓고 냉장고 앞으로 걸어가 꺼내든 찬 물을 마실 때, 그 물이 시원하게 목을 넘어갈 때가 있다면, 아, 오늘도 난 참 힘들었었구나 하고 문득 생각하게 된다. 나를 위로할 마음을 준비 하는 것이다. 워낙에 힘들었을테니까. 여기저기 치이고, 주변 사람들은 내 말도 안 들어주고. 바람때문에 머리 헝클어지고, 블라우스에 커피 쏟고, 칠칠맞다고 부장님께 꾸중 듣고, 점심은 혼자 먹고. 커피 타오라 시키고, 커피 진하다 꾸중 듣고, 내 머리카락 정리 안 되어 보인다고 묶으라 하고, 내가 안 그랬는데 복사기 망가뜨리지 말라 꾸중듣고. 퇴근 시간 가까워지자 들 뜬 마음으로 시계 자꾸 쳐다보지 말라 하고, 회식 가자 하고, 술 한잔 더 마시라 하고. 2차 가자 하고, 딸 같아서 아빠의 ..

마치 시간을 초월하는 듯한 여러 통의 편지를 남긴 여성이 자신을 감옥에 가둔 남자를 그리워하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그녀는 어떤 숲숙 깊은 곳에 위치한 저택에 끌려가 살해 당했고, 그런 참극을 당하기 바로 전에 남자를 위한 편지를 그 저택 어딘가에 숨겨놓은 것이다. 세월이 흘러 남자는 그 저택을 소개 받아 살게 되고, 그곳에서 그 여성의 편지를 찾게 된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 집에서 당장 나오세요.」 하지만 그 남자는 그 편지를 읽고 난 후에 살해 당하게 된다. 여성이 걱정하던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경찰은 그 곳에 백골화 된 시체를 조사하며 이야기를 파해쳐가기 시작했다. ……그런 전개로 시작되는 소설이었다. 형사는 그 자리에서부터 시작되는, 단서들이 제시하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 나는 물었다. 저녁이 되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중에, 난로 속이 새까만 것을 보고는, 아 내 속도 새까맣게 되었었지 하고 떠올리게 된 것이다. 더글러스는 창가 너머를 바라보다 뒤를 돌았다. 작업복으로 입는 면바지가 지저분했다. 그는 오늘 주인 아저씨를 도왔다. 선명하게 빛나는 눈매 끝자락이 나를 향해 있다. 응시하고 있음을 괜히 의식하게 되면 견딜 수 없다. 난 고개를 다시 난로쪽으로 돌렸다. 괜히 작은 장작 하나 넣어본다. 더글러스는 반투명한 커튼으로 창가를 가린 뒤에 의자를 하나 들고 내 옆에 앉았다. 가늘고 긴 다리를 쭉 늘어뜨리며 기지개를 펴는 그의 턱선에 눈이 가고야 말았다. 역시 자연스럽게 난로쪽을 보기로 했다. 가로등 빛이 외롭게 들어오는 이 방. 하지만..

산뜻한 공기가 느껴졌다. 이곳은 보통 비가 자주 오지만, 오늘은 그런 날씨가 아니었던 것일까. 뽀송한 공기 속에서, 포근한 부드러움이 달콤한 채로 나는 눈을 떴다. 이불은 왜 이토록 사람을 끌어들이는걸까. 몸을 뒤척이면서, 어깨를 제대로 덮지 못하는 이불을 끌어 당겼다. 기지개를 켜는 팔과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밝은 햇빛이 내리쬐는 창문을 등지며 나는 반쯤 눈을 떴다. 아주 천천히 굴러가는 눈동자가 주변것들을 보여주었다. 어디선가 주워왔던, 짝을 잃은 식탁 의자 앞에 서서 상체를 벗은 채 팔을 돌리며 몸을 풀고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하얗게 빛나는 금빛이 눈부시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세련되고 날카로운 얼굴 선이 멋지다. 근육이 크게 부풀지 않았지만 내실이 분명 탄탄하리라 생각되는 등근육과 팔근육도..

맥블럭은 단순히 인사를 했다고 생각했다. 워낙에 호탕한 성격이었고, 무엇이든지 내 앞에서 털어낸다 생각했다. 그러나 맥블럭은 그 날 즐겁에 웃으며 떠들던 마지막 저녁 식사를 후회하는 아침을 맞이하고 말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후유증을 앓으며 물을 찾는 맥블럭 앞에 아무도 없음을 깨달았다. 차가운 바닥에 발을 대고는 잠시 머리를 휘젓는 현기증을 견뎌 내었다. 그는 반쯤 눈을 감으며 화장실을 갔다 오고, 기계처럼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냈다. 차가운 우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달 전기료를 재촉하는 종이쪼가리가 칙칙한 식탁 위에 놓여있었다. 아침 운동을 나가기 위해 옷을 입고, 양말을 신고, 운동화의 끈을 조였다. 발목에 딱 감기는 안착감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새 찬 공기를 가르기 위해 뛰쳐 나갔다. 7시. ..

나는 지금까지도 주변에 비해 그리 좋지 않은 연립주택 한 공간에서 살고있다. 빽빽하게 들어선 책들을 연상케 하는, 암갈색 벽돌로 지어진 테라스 하우스였다. 매 월 벌이가 좋지 못한 나로써는 비와 바람을 피할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말고 들어가야 했다. 방 하나라도 빌렸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던 내가 조금이라도 욕심을 낼걸 그랬나 하고 마음을 바꿨던 건 실제로 건물 안에 들어와서였다. 내 전재산이 들어있는 여행용 가방 손잡이를 꼭 쥐었다. 퀴퀴한 먼지가 자욱했지만 다행히 곰팡이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겨우겨우 버텼던 것 같지만. 꼭대기 층이 다 그렇지 뭐.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돈이 없었으니까. 굳이 자취를 핑계로 둘 필요도 없었다. 우리집이 망하여 쫒겨난 이후로, 그리고..

당장 우리집으로 끌고온 나는 난로를 켜고 그 앞에 세실을 세웠다. 은색에 가까운 블론드인 그의 머리카락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반짝인다. 나는 타올을 가져오겠다며 다른 방으로 옮겨갔다. 녀석은 아무런 말도 없었고, 내가 타올 세개를 들고 올때까지 계속 그 자리에서 난로 불만 보고 있었다. 시선이 고정된 채, 반짝이는 채로, 더글러스는 서 있었다. 나는 타올 하나를 펴서 그의 머리 위에 얹어주고는 두 팔을 들어 정성껏 닦아 주었다. 더글러스는 나보다 머리 하나 더 있는 정도의 큰 키였고, 나는 그를 올려보아야 했다. 그가 내게 눈길을 주지 않는것을 신경 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그는 지쳐있음이 분명했다. 어깨가, 축 쳐져있는 어깨가 오들오들 가늘게 떨고 있었다. "빨간 머리야.." 그가 나직이 ..

친구를 기다리는 것은 이제 지친다. 약 2년 전, 이 녀석은 사라졌다. 사라지는 뒷모습이 너무나도 가혹해서, 나는 정나미가 떨어졌다. 이 녀석을 계속 친구라고 불러야 하는 것인지, 나는 좀처럼 결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에 솔직하자. 녀석이 돌아와 내 앞에 섰을 때, 나는, 나를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분노와 녀석이 무사하다는 것에 안도감과 기쁨을 느꼈다. 이상한 녀석이었다. 녀석은 내가 이제 그를 잊으려고 할 때에 내 앞에 나타났다. 나의 인내의 한계를 알고서, 이제 그만 골려줄까 생각이라도 한 듯 나타났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너무도, 이기적이고 슬픈 일이 될 것이다. 양복은 언제나 어울렸다. 바지가 그리 깨끗하지도 않고, 여기저기 길게 구겨져 있던 자국도 남아 있었다. 그런 바지와 흰 와이셔츠..

책상을 정리하다가 찾게 된 책 한권이 있다. 상당히 얇은 종이가 내지로 사용 된 책인데, 전체 사이즈로 따지면 손바닥만한 크기이다. 어디서 많이 봤지만, 정확하게 무슨 책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던 나는 그 책을 망설임 없이 펼쳐 보았다. 뚝 떨어지는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와 나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오후 밝은 빛이 어두운 방 먼지를 빛냈다. 개인적으로, 이 무거운 분위기를 좋아한다. 몇번 접혀있는 그 종이를 펼쳐 보았다. 편지였다. [ 이 편지가 당신에게 다다를 것이라 전 생각해요. 그렇지 않는다면, 전 이 편지를 몰래 버렸을테지요. 기한이 정해져 있어요. 이 편지를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이 가능한 시간이. 안녕, 내 남자. 평안해야 해요, 당신은. 나같이 굴레에 속박되어 살지 말아주세요. 우주가 어떻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