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文]/단문

바닥이 육각형인 커다란 방이 있다. 육각형 가운데에, 그 바닥에는 유럽 박물관이나 성당을 떠올리는 눈꽃 모양의 갈색 장식들이 디테일하게 박혀 있었다. 잘 가공된 암석들이 벽을 이루고 바닥을 이루고. 견고함이 상당하다. 어둑하고 차분한 주황빛 샹들리에가 주변을 빛냈다. 고풍스러운 공기가 흐른다. 벽에도 초가 타며 빛을 낸다. 사물은 관찰자의 사물 인지를 통해 그 존재를 드러낸다. 그러지 않고서는 사물의 유무는 의미가 없다. 이 주변 저 주변에 걸려있는 액자들과, 이젤 위에 올려져 있는 캔버스들과, 부드러운 천이 표현된 석상과, 천장에 그려진 하늘과, 벽 기둥을 따라 올라가 있는 장미꽃과, 아름답게 옷 입고 있는 마네킹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수 많은 사진들이 방을 채울 기세로 배치 되어 있다. 이 방은 ..

[시간을 달리는 소녀]라는 애니메이션의 장면이 떠올랐다. 강이 노을에 물들어 있었던 것 같다. 그 장면에서, 주황색 머리의 남자는 주인공 여학생을 껴안으면서 미래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여학생은 그런 그에게 알겠다고, 금방 가겠다고, 뛰어간다고 말했다. 강뚝을 걸으며 둘은 그리 이야기 했다. 그리고는 영화가 끝난다. 신기하게도, 나는 그 장면과 꼭 닮은 곳에 서 있었다. 자전거 도로로 포장 되어 있는 뚝방길 위에 서 있었다. 우중충한 하늘 아래에, 검은 코트를 입고서, 하얀 입김이나 나약하게 내 뿜으며, 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서 있었다. 목도리가 없어서 그런가. 가슴이 시리다. 애니메이션에서는 그렇게나 완성된 사랑이 있었는데, 현실에서는 그저 색감 없는 현실감 뿐이다. 당연하게 헤어지고..

아프지는 않았다. 지금 내가 허공에 떠있다는게 느껴질 정도로 내 머리는 차분하면서도 멍했다. 그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말로, '아, 내가 떠 있네?' 하고 느껴질 뿐. 내 앞에 서 있는 꼬마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방금전까지 부모님과 놀이공원에 간다는 것에 매우 기뻐했던 아이였다. 여자애였는데, 이제 한 6, 7살 쯤 먹은 것 같다. 귀여울 나이지. 그 아이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입가에 미소가 스며들어 있고 눈꼬리가 웃고 있다. 그 얼굴이 귀엽다. 미안해. 시간이 쭉 늘어나고 있다. 찰나동안 주변의 모든 정보가 머리에 한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모든것을 인식할수 있는 이 1초를 가치있게 여긴다. 나는 여전히 떠 있으니까. 이상하게도 청각이 좀 늦다. 쇠를 깎아 긁어내는 소리가 아래에서 꿰찔러 올라..

연필이 굴러가는 소리가 방에 울렸다. 연필은 잠시후 멈추었다. 그러나 그것이 멈춘것은 자연의 힘으로 그리 된 것일 뿐. 그 어느 누구도 그것의 길을 막지 않았다. 녀석은 저 위 검은 책상 위에서 떨어졌다. 무거운 원목으로 만들어진 고가의 책상으로, 사장님들 앞에나 있을법한 웅장한 사이즈의 책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책상 위는 허전했다. 종이 한장에 엎어져 있는 한 남자가 매마른 눈을 뜬 채 벽이나 쳐다보고 있다. 나무놀이를 하는것 같다. 흑백과 회색빛의 색 없는 방 안. 그레이한 우중충함이 그곳에 한가득. 연필로서는 그렇게밖에 그릴 수 없는, 색깔 없는 세계. 그런 연필이 색깔을 만드는데에는 약간의 힘이 필요했다. 연필심이 부러져 있었다. 그러고보니 그는 살아있을 적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평상..

필요없다고 말했는데도 굳이 가지고 와서는 시계를 분해하고 마는 모습에 나는 이마를 짚고 서서 그 모습이나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오전이다. 10시 반 쯤 되었을까. 자고 있는 나를 방해하는 초인종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을 때, 나는 단번에 이녀석이 온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다. 이건 짐작이 아니고 감이다. 날 선 감이 평소보다 격하게 발휘될 때가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참 기가막히게 짜증나는 타이밍이다. (*생리를 이렇게 묘사하면 공감이나 갈까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불쾌하기만 할 듯. 20171203)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 내가 자는 것보다?" 나는 발로 툭 건드리면서 물었다. 녀석은 앉아서 전동 드라이버로 시계를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분해하고 있었다. 이 시계는 선물 받은 것이다. 전체 외관..

잡동사니를 팔고 있는 가게이다. 앤티크풍의 디자인으로 주변을 가꾸다 보니, 첫 인상은 어느 중후한 가구점 아니면 보석점같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세계에서 들여온 잡동사니들이 모인 이곳. 골동품가게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사람들이 이곳에 자주 들어오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요즘에는 이런 아름다운 물건보다는 '편리한' 물건이 더 많이 필요한 때이니까. 더군다나, 아름답게 자신을 치장 하려면 적어도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주를 이루는 요즘 경제 아닌가.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곳에 흥미있게 들어와서 둘러보다가 마음에 든 물건이 있어서 가격을 물어본 후, 아가씨가 제시하는 가격을 듣고 깜짝 놀라는게 일반적인 순서였다. 냉큼 지갑이 열리는 모습을 아가씨는 본다. 신기한 일이다. 이 물건..

달팽이들은 모두 학자이다. 책을 읽기 위해서 열심을 기울이다보면 자연스레 눈이 튀어나올 수 밖에 없다. 새끼들은? 음. 알 속에서부터 책을 많이 봤나보지. 지식이 쌓여있는 곳을 그들은 좋아한다. 비가 내리는 곳 아래에서 그들은 운치있게 책을 읽는다. 지식이 자신의 머리를 채우면 그들은 행복하다. 문제는, 그러다가 너무 심하게 행복에 취하다 보면 길거리에 나와서 유레카를 외치다가 누군가에게 밟혀 죽고 만다는 것이다. 저런저런. 빗방울에 비치는건 잠깐의 미래지향이더냐. 그들은 죽을 때에도(이번엔 자연사이다) 지식이 있는 곳에서 죽는다. 파묻힌 채 죽는다. 그들은 그곳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다. 달팽이들이 느린 것은, 언제나 사고(思考)하기 때문이다. 한걸음 한걸음마다 생각을 정리한다. 그들은 사방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