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09 요즘 진척이 있습니까

2019. 4. 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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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9

 

요즘 진척이 있습니까?

 -하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운 주변 소리와는 다른 공허한 머릿속이 와장창 깨지듯 정신이 돌아왔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물었다. 

 "아, 저기, 죄송해요. 제가 말씀하신 걸 제대로 못 들어서."

 아뇨, 제대로 들으셨어요. 들으신 대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 말을 커피 홀짝이면서 말하더라. 내가 들은 거라고는 요즘 진척 있냐는 물음뿐이었는데, 들은 내용을 아무리 되새김 해 봐도 주어가 무엇인지 떠올릴 수 없었다. 

 "글쎄요."

 그렇군요,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말했다.

 

 머리를 긁었다. 공허한 머릿속, 이라고 표현은 했다만. 사실 그런 머릿속은 오히려 공상으로 가득 찬 상태가 아닐까.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대화의 흐름도 끊어놓고, 사회생활 아주 잘하고 있구나 나는.

 행여나 저쪽의 말을 놓칠까 나름 각오하면서 귀를 기울여 잘 들으려고 하는데, 앞에 앉아 있는 저 사람은 생각보다 참 별나서,
 대뜸 내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요즘은, 생각들에 진척은 있습니까?

 

 그 순간 나는 백사장으로 이뤄진 무인도를 보게 되었다. 카페에 걸려있던 포스터 그림이었다. 크래용으로 그린 것 같은 질감이 눈에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모래 알갱이를 보는 느낌이었다. 스르르 물결 따라 흐르는 모래알.

 그리고 나는 또다시 공상에 빠지고 말았다. 미쳤지. 머릿속에서 착란이라도 일으켰나 보다. 눈 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카페 테이블과 소파를 동료로 이곳에 와 있게 되었다. 우리는 모래로 이루어진 아주 작은 섬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공허한 머릿속이라 말하던, 사실은 온갖 공상으로 소용돌이치던 이곳은,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넓고 고요한 에메랄드 빛 바다였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걱정이라는 게 막연하게 마음에 남아 있을 때, 어서 그 걱정을 떨쳐내고는 싶은데, 정작 그 대상을 알 수 없으니 무척 괴롭다고들 하죠."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람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분명 얼굴을 몇 번 마주 봤던 기억은 있는데, 두 눈을 마주친 건 이번이 처음인 기분이었다. 바다 색이 반사되어서 그런가. 초록 보석처럼 반짝였다.

  "걱정이 있어서 괴로운 건지, 아니면 단순히 지금이 괴로운 건지도 구분하기 힘들 때가 있고. 나 혼자 잘 사는 것도 힘든데 누군가를 곁에 두는 것이 맞는 건지, 아니면 오히려 곁에 아무도 없어서 괴로운 건지 구분이 되지 않을 때고 있고요. 이럴 때도 아마, 그 괴로운 감정들이 막연하게 짓누르는 기분이 들 수 있겠죠. 아마도."

  그런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외롭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곁에 있는 사람들이 귀찮다 느껴질 때도 있기는 했지만. 혹시 그런 얘기를 하는 건가? 당초,

  "생각에 진척이 있었냐 물으신 건, 뭐가 궁금하셔서 하신 질문인가요?"

  나는 물었다. 그는 잠시 물장구를 치다가 이내 멈췄다.

  "단지 흙이 채워진다 해서 땅이 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흙이 단단해져야 땅이 되는 것이죠. 당신이 설 수 있는 그런 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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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2

 

  고민을 하는 것은 정신을 수영하는 것과 같아서, 몸 밖에 채워져 있는 무언가를 밀쳐내야만 앞으로 갈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잡음들을 신경 쓸 여력은 없다. 주변의 배경이 어떠한지, 외침이 들리는지, 내 발에 닿는 것이 물과 거품과 공기인지를 확인할 여력은 없다. 

  앞으로 가려면, 그저, 박차고, 밀어내야 할 뿐인데.

  생각에 진척이 있는 것과, 땅이 단단해져 가는 것이 같은 의미라면, 진척이 없는 생각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앞으로 가려 한 노력은 어떻게 보답받을 수 있는 거지?

  "서 있어야만 하나요?"

  "서 있으면 더 오랫동안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상대가 자리에서 일어나, 구두 신은 발을 바닷물에 적시면서 말했다. 아주 잔잔하고 선명한 파도 소리가 찰박찰박 들려왔다.

  "당신이 태어나 살게 된 이 곳은, 지금 내가 이렇게 서 있을 수 있는 게 신비에 가까울 정도로 넓고 깊게 고여있는 바다 한가운데니까. 당신은 어디서 쉴 수 있나요?"

  저 멀리 우두커니 서 있던 바위가 바다로 가라앉았다. 반대편에 떠 있던 빙하가 부서지면서 사라져 갔다. 아주 멀리 있는데도 아주 커다란 덩어리들이어서, 푸르게까지 보이던 것이었다. 

  나는 테이블에 걸터앉아 하늘을 둘러보는 그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새삼 발가락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모래가 느껴졌다. 

  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안정을……, 헤엄칠 땐 알 수 없죠."

  악착같이 발을 놀려야 겨우겨우 떠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런 생각이 잠깐 스치면서도, 그 의미는 선명했다. 발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쓸어내듯이 바닷물을 걷어보았다. 부드러운 모래가 땅을 이룰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쯤 보고 있자니 마음 한 켠이 비참해져서 견딜 수 없었다. 이 땅은 내 땅이 아니고 내 모래도 아니어서, 어떻게 해야 이런 안정을 가질 수 있을까 싶어서. 그리고 그때서야,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이 살고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가져오는 동정심과 비탄이 거친 물결처럼 파고들어왔다. 

  차가운 파도가 온몸을 덮듯, 오늘을 살아간다는 건 정말 아등바등 괴로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들이 흘러들어왔다. 묶여있지 않은 조각배처럼 이리저리 휘둘렸다. 

  나는 여전히, 포스터에 그려진 모래섬에서 이렇게 고요하게 서 있는데. 

  남자는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도, 친구도, 당신들의 부모님들도, 그 부모님들도, 거슬러 올라가면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줌의 모래를 원했고, 때로는 자신은 더는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한 채 다음 세대를 위해 모래를 모아 왔지요. 모래와 고요한 바다가 만나야, 그때서야 이런 조그마한 섬이 만들어질까 말까 하는 이런 현실 속에서. 사랑 많게도. 사랑스럽게도."

  커피의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신 남자는 그제야 사람같이 웃었다. 변한 건 없지만 그래도 희망적이었으면 한다는 그런 애잔한 모양새의 입가만 바라보았다. 

  나긋한 바람이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는 모래를 함께 모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뺏어갈지도 모르고, 바람이, 파도가, 햇빛이, 어둠이, 또는 모래 그 자체가 당신을 방해할 날도 있겠지요. 몇 걸음만 걸으면 그 일들을 포기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그 어떤 형태도 없는 막연한 바다가 가져다주는 고독감과 괴로움은 사라질 수 있어요. 바다를 없앨 수는 없겠지만,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땅을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 그렇게 성장하길 바라며, 계속 지켜볼 거니까. 

 

 

 

  망상이 깊어지면 헤어 나오질 못한다, 고들 표현한다. 형태가 없기 때문에 헤어나오질 못한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늪과 같아서.

  시끄러운 음악과 사람들의 잡음이 돌아왔다. 테이블 앞에는 그 남자의 명함이 놓여 있었다. 남자는 모래섬 위에 있던 그때의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처음 얼굴을 마주했을 때와는 많이 다른 인상이었다. 

  잘,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내 속에 있는 불안과 뿌연 괴로움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사람마다 그 의미가 모두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의미에서, 그런 건, 다른 사람들도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나만 별난 것도 아니고 유독 괴로운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 해서, 내게 땅이 필요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 생각이 번뜩였다. 

  딱 한 줄기가 잡히는 기분이었다. 한 가닥을 쥔 기분이었다. 무언가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다음을 위해 나아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한 가닥을 쥐었다면, 다음 가닥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웃기다.

  - 생각의 진척이, 있었습니까?

  그가 물었다. 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진척이라 하기엔 너무 추상적이고 기분 탓인 것처럼 느껴져서. 하지만 전에는 없던 기분이었다는 점에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아닐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잔잔한 바다가 있는 곳으로 여행을 좀 다녀올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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