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 5
ː 거미. 증발.
새벽에 잠을 깨는 일은 적지 않다. 그렇다고 익숙한 것도 아니다.
오늘도 마찬가지겠다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직 공기가 서늘한데도, 찬물이 마시고 싶었다. 이불 속에 파묻힌 채로 바닥에 누워있는 언니(호 : 아려(雅麗 품이 아름답고 고음) / 이름 : 라온)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
부엌 천장의 형광등을 켜고, 살금살금 걸어 소리 나지 않게 컵을 들고, 물 따라 마시고. 깊은 폐부 속에 뭉친 차가운 숨을 조용히 몰아쉬고.
그렇게 정신없이 일련의 행동들을 무의식적으로 해내고는, 지주는 그때서야 몽롱한 잠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전 3시 2분.
컵을 싱크대 상판에 점잖이 올려는 놓지만, 심기는 차분하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몽롱한 기분으로 흔들거리며 걷던, 잠에 빠져있던 어렴풋한 기운은 걷혀가고 있는 게 분명했는데, 좀처럼 현실감각에 돌아갈 수 없었다.
불안하고, 아려오는 감정.
지주는 이 기분을 잘 알고 있었고, 새삼스레 또 찾아온 거냐며 질색했다.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언니가 깨어 있었다. 라온 아려의 시선이 어둠속에서 느껴져 왔다. 그녀는 반쯤 일어나 벽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지주가 언걸먹는 꿈이라도 꾼 거 아닌가 싶어.”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차가운 음색. 지주는 잠시 문 앞에 서 있었다. 역광이 된 지주는 새까맣다. 새까맣게 탄 나무덩이처럼 서 있었다. 꿈이 그를 태운 것인지. 그는 본래부터 타 있었던 것인지. 살아오면서 지금껏 타 있었던 것인지. 지주는 모른다.
“정말이야. 아무리 꿈이라도 이런 법이 어디 있대요. 참 잔인해.”
아려가 누워있는 이부자리 위로 겹쳐 눕듯 쓰러졌다. 차가운 이불 표면이 바스라지고, 이내 언니의 체온이 그 속에서부터 살며시 느껴졌다. 지주가 두 팔을 언니의 등 뒤로 집어넣어 꼭 끌어안았다. 지금의 기분은 말하기 힘들다. 아직 구체적으로 무어라 말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뿌옇고, 잡히지 않았다. 짜증이 올라온다. 슬프려면 확실히 슬프던가.
“내내 끙끙 앓다가 펑펑 우는데, 내가 깨워야 하나 고민을 수도 없이 했단다.”
“얄궂어. 깨고 나서는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얼굴을 품에 문지르며 애처럼 굴었다. 라온 아씨의 손끝이 지주의 머릿결을 타고 차근차근 쓰다듬어 주었다. 쏟아지는 머리카락을 따라, 빗질하듯 쓸어주기도 했다.
서늘한 목 뒷덜미가 드러나고, 이내 시선은 지주의 가쁜 숨 몰아쉬는 등짝으로 옮겨져 갔다. 불규칙한 떨림이 더해져 있다. 지주는 흐느끼는 것 아니었을까. 얼굴을 보지 못해 아려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정작 깰 때는 참 점잖이도 일어났어. 그래서 네가 사람인가 싶었어.”
“응. 사람 아니죠. 나 같은 요괴.”
“바보. 미안하게 만들고, 정말.”
지주는 품속에서 이불에 먹먹해진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리고는 조금 더, 팔에 힘을 주어 아려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 건지, 느닷없이 숨을 삼키듯 흐느끼다가도 억지로 심호흡 하려는 듯 깊은 호흡을 쏟아내곤 했다. 긴 시간동안 계속 그렇게만 반복했다. 언니는 몇 번이고 생각을 되짚은 후 눈치껏 입을 열었다가, 이내 말하기를 그만두었다. 지주가 소곤거렸다.
“얼굴이라도 떠오르면 몇 시간이고 흐놀다 지쳐 잠들 텐데. 어떤 놈의 면상인지를 알지 못하니까 마음 언저리만 간질거리고 괴롭고 쓸쓸하고. 정말 얄궂은 녀석이에요, 이번 꿈자리의 녀석은.”
“그래그래. 남자 놈들은 하여튼 그렇지.”
같이 오라질 놈이라 한마디 해주니 지주의 기분도 여간 웃긴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맥이 빠진 몸을 들어 올린 지주는 겨우 얼굴을 들어 올렸다. 입가는 미소를 머금었지만 눈가는 슬픔만 역력했다. 지주의 코끝은 언니의 코끝에 닿을 것만 같았다.
“먼저 보낸 사람 중의 한 명이겠죠? 날 버린 사람이 아니라.”
“당연하지. 널 버린 사람이 무슨 연유로 아는 척하려 하겠어. 네가 그리운 사람이 꿈속에 나타났을 거야.”
“그런데 어쩜 이렇게도 안 떠오를 수가 있지. 아무런 인상도 못 남기고 사라졌어요.”
얼굴을 멀리 떨어뜨린 지주가 아려의 허벅지 위에 앉으며 말했다. 언니는 공기 새어 빠지는 듯한 웃음으로 적당히 받아주었다. 지주는 헝클어진 머리를 적당히 뒤로 넘기며 정리했다. 눈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제대로 울지도 못하게 하잖아. 가장 잔인해.”
“누군지 몰라도 혼내줘야겠다.”
“네. 혼내줘요.”
지주가 배시시 웃었다. 아려의 가슴 한 구석이 씁쓸해졌다. 오래 사는 사람이란 결국 이런 식으로 과거와 연애한다. 이전 사람을 잊지 않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 앞으로도 이런 꿈은 수도 없이 꿀 것이다.
얼굴 한 번이라도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분발 좀 하지 않을래? 라온이 속으로 그렇게 핀잔을 주었다. 두 손으로 지주를 가까이 끌어와 안아주었다.
“그리움은 오래될수록 씁쓸해지나보다.”
“응. 새삼 느끼네요.”
그 후로는 오랜 시간동안, 초침 소리와 등 토닥이는 위로만 공기를 울렸다.
지주와 아려는 이번 아침만 조금 늦게 기상하기로 했다. 다시 잠들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니까. 또다시 같은 꿈을 꾸게 될지도 모르고, 같은 과거가, 같은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촛불 흔들리는 어두운 방 아래에서 누군가와 둘이서 마주보던 아주 오랜 기억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지만, 지주는 그 촛불이 사그라지던 기억에 맞춰 다시 잠들었다.
라온 아씨의 한숨이 새벽처럼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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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걸먹다 - 누군가로부터 해를 입는다. 해코지 당한다.
흐놀다 - 사무치게 그리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