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文]/거미

거미 4 강물처럼 흐르던 세월을 따라, 지나간, 누군가의 말 한마디. "하루가 가고 밤이 오면" 문득 들은 노래 가사에, 가슴이 놀란 듯이 떨렸다. 이 기분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나를 초라하게 만들어도 기쁜, 어떤 거대한 것을 만났을 때 오는 두려움이 가져오는 감정이었다. 하루가 가고 밤이 오면. -그렇게 생각하기도 지쳐 잠들던 때가 과거에 얼마나 많았던가. 하루는 그러다가 문득 눈을 떴는데, 검푸른 새벽하늘이 검은 물결을 만들며 흐르는 걸 보고는 그 장엄함에 놀랄 때가 있었지. 처음에는 하늘이 꿈틀거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뱀의 꿈틀거림이라기보다는, 깊고 거대한 바다 같은 움직임이었다. 무수히 빛나는 별이 흐르는 거대하고 끝없는 바다 위로, 나는 땅에 매달려 있는 기분이 들었다. 몸이 느끼는 날..

거미 3 나는 이전부터, 옆 집 남자에게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왜 내 팔이 그에게 보였고, 그는 어떤 이유로 내 팔을 잡을 수 있었을까. 보통이라면 그 누구도 눈치챌 수 없는 것이었을 터인데. 하긴, 그 사람을 보통이라 말하기엔 터무니 없이 낙천적이긴 했다. 낙천 속에 어떤 비범한 능력이라도 있었던 게지. 농담이지만. 그런데 이게 나를 여간 피곤하게 만드는 게 아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 고민에는 이유가 있다. 그가 참 좋은 사람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그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혹시 그에게는 내 눈들도 보이는 것일까. 이 의문이 언제부터인가 나를 걱정 속에 살게 하고 있다. 사실 그가 지금 내 눈의 존재들 -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내 나머지 6개의 눈들 - 을 눈치채고 있..

거 미 2 무릇 새벽은 피부가 곤두서게 서늘한 법이다. 얼굴을 스치는 냉기에 정신이 들었다. 잠이 들어있던 만큼 체온을 잃었으니, 이불 속으로 몸을 웅크리며 파고 들었다. 돌아다닐 사람도 없을 터인데, 누런 가로등 빛 아래에 무엇인가를 보기라도 했는지 멀찍이서 개가 짖는다. 그 소리가 밤하늘 아래, 건물들 사이로 울려 퍼졌다. 때때로 차가 지나가는 소리와 경쟁이라도 하는 듯 싶었다. 벽걸이 시계의, 공기를 저미는 소리만큼 거슬리지는 않았지만. 물을 마시고싶어 일어났다. 징그러운 팔들을 들어 기지개를 켰다. 등에서부터 손끝까지 뼈가 제자리를 찾는 듯한 소리가 났다. 배를 긁적이고는 자리에 일어나 냉장고 앞으로 걸어갔다. 아침이 되려면 아직 좀 더 고요해야 하나? 저 산 뒷쪽 깊숙이 해가 기어올라오고 있을것..

거미줄을 망가뜨리는 것은 거미 자신이 아니다. 주변에서 날아오는 온갖 것들이, 보금자리를 찢어놓는다. 그러나 거미는 그 집을 버리지 않는다. 다시 기워내고, 완성시켜, 그 집에서 또다시 생활한다. 그 집을 떠나는 날이 있다면, 그건 그 집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와 자신이 죽었을 때, 뿐이다. ◇ 거미가 그녀가 된 지 몇백 년 지난 후로, 그리고 그녀가 이 낡은 빌라에서 살게 된 후로, 거미는 이곳을 한번도 좋아했던 적이 없었다. 사람처럼 산다는 것은 그리 낭만적이지 못한 것이라고 예전부터 생각해 왔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차라리 생각에 그쳤던 옛날이 더 좋았다. 그땐 그게 꿈으로서의 매력이라도 있었지. 샤워를 끝내고 선풍기 앞에 앉아 있으니 떠오른 추억 하나. 사람들이 논에 발을 푹 담그고 모를 심는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