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文]
야한 꿈을 꾸었다.청소년이 꾸는 그 야한거 말고, 꿈 속에서 정말 '야!'하고 소리 친 꿈이었다.새 하얀 배경에,나 혼자새하얀 원피스 입고,바람 한 점 없는 그 곳에서정면을 보며"야! 야! 야!"하는 꿈이었다. 이게 무슨 개 풀 뜯어서 녹즙 빼 마시는 꿈이야?!! + 그 묘한 꿈에 번뜩 눈을 뜨고야 말았다. 아무래도 이 꿈은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일어나자 마자 휴대용 뇌파 검지기를 머리에 붙였다. 오늘의 바이오리듬은 과연 어떠려나.그러나 아쉽게도 뇌파 검지기의 색깔은 탁한 회색으로 변하였다. 오늘은 그리 좋지 못한 듯 하다.하긴. 그러니까 저런 꿈도 꾸지. + 오늘은 일요일. 미스터 크리스트는 안식일이라고 지정 한 날, 이라고 알고 있지만, 이미 율법은 폐기 된지 오래이니, 안식일이란 것도 사실은 없는..
어느 여름.휴대용 슬러시 컵을 든 채로 길을 걸어 나아갔다. 아슬아슬한 곳까지 올라온 핫팬츠 마저 더웠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 걸었다. 새하얀 상의는 도시 건물 곳곳에서 부는 선선한 바람에 나풀거리고 덕분에 그 바람이 속으로 들어와 시원했다. 그러나 이런 날 밖에 나왔다는 것 자체가 싫다.자이로도 불평 불만이다. "금속이 팽창했어. 이대로라면 마찰계 면적 부위에 걸리는 마찰이 0.00153에서 0.0035로 증가한다고. 어서 시원한 곳으로 가자.""그러지 마. 그만한 증가는 이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아." 터덜 터덜.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슬러시를 한 모금 마셨다. 가슴주머니에 들어가 출렁 늘어져 있는 자이로는 이리 저리 흔들려 움직인다. 가끔씩 '중심계 이탈!'이라던가, '중립축 궤도 이탈!'이..
0# 요점은 그것이다. 초소형 AI가 판을 치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 겨우 자이로스코프 중심에다가 그것들을 심어놓는 실력밖에 없는 나로서는, 이 세상의 발전이 너무 빠르다. 구름은 저리도 느리고, 등굣길도 언제나 바뀌지 않는 만큼 세월의 흐름은 느릴 줄 알았거늘, 단지 30년 전의 사진과 지금을 비교 해 보면, 이 세상은 총알보다 빠르게 지나가버렸다. 우앗, 빨라! 남들은 막 손가락에다가도 AI를 심어놓기도 하고, 또는 뇌와 동일한 자리에 두어 좀 더 논리적인 사고를 향상 시키기도 한다. 물론 그런 것은 고급이고, 복잡하고 상당한 기계와 결합을 시켜 AI의 기능을 업그레이드 시키기도 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도 고급은 고급이다. 반대로 나의 경우는 그냥 자이로스코프의 무거운 회전 추 중심을 파내어 그곳에..
"겨울이야." 차가운 공기는 진작부터 서성이던 어느 12월. 소녀 G는 또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다. 나는 말했다. "달력상 진작부터 겨울이었어.""하지만 눈이 안내렸잖아. 눈이 내려야 진정한 겨울이라 할 수 있는거야." 나무의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고, 길에 쌓이던 눈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탓에 미끄럽게 눌려버려 총총걸음을 걷게 만드는 장본인이 되어버린 현실이 비로소 겨울이라고 말하는 그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잉어빵을 먹으면서 같은 공기 속에서 같은 정면 분수대만 바라보던 우리는 그렇게 생각도 같아져 가고 있었다. "그렇군. 눈이 있어야 겨울이군.""응.""그럼 봄은?""봄은.. 대학 등록금 고지서?""...너무 현실적이라서 슬픈데.." 그리고 이쯤에서 생각이 나뉘어 지는군. 시린 공기가..
소녀가 말했다. "마음을 다 한다면 산도 움직일 수 있고 바다도 말릴 수 있대." 꽤나 서늘해진 가을이다. 아니, 가을도 이제 옷단장을 다 한건지 슬슬 떠나려 하는 것 같다. 그런 낙엽진 길을 걷는 나와 소녀는 조용히 그것들을 밟아 나아갔다.소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뭐든지 할 수 있다 생각하면 되는거야.""그렇구먼. 아.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 난 고개를 끄덕였고 소녀도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말에 자신이 납득 한 것일까.내가 말했다. "그럼, 마음을 다 해서 산을 움직일 수 있으면…, 다른 일은 무척 쉽겠네?""하나를 알면 둘을 깨닫는구나." 소녀가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발걸음이 가벼워진건지 점점 빨리 걷기 시작한다.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마음을 다하면──" 하늘은 새 파랗고 구름..
"어떤게 좋은걸까..." 나는 소녀에게 물었다. 이따금씩 시원한 바람이 덩어리째로 불어와 머리를 흩날렸다. 감흥도 없던 오뎅국물이 생각나는 계절이 다가온 건 꽤나 전부터인데, 새삼 다시 느끼게 되는건 아이러니 하다. "무슨 소리야?" 소녀가 다시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들렀던 악기점에 일렉 기타 말이야. 하나 사고 싶은데 뭘 고를까 싶어서." "애도 아니고. 사고나서 흥미 떨어져서 금방 구석에 쳐넣는거 아냐?" "비싸서라도 그렇게는 안할걸.." 우물우물 붕어빵을 씹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확신있게 대답하지 못한 건, 우리집에 이미 비싸지만 먼지가 쌓여가고 있는 전기 오븐이 있기 때문이다. 난 이미 전과가 있는게야. 어쩌지. "...뭐.." 나는 말했다. "됐어. 괜찮아." "뭐가?..
그다지 아팠던 건 아니고, 그냥 뭐, 가끔씩은 집에 있고 싶어질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성으로, 나라는 사람은 이렇게 집에서 편하게 쉬었던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서도, G의 눈빛은 마치 사달라는 것을 사 주지 않은 탓에 삐쳐버린 어린아이들의 곁눈질 같이 뾰루퉁해 있었다. 아니, 조금 더 정리해서 잘 이야기 해 보자면, 뜻하고자 했던 어떤 일을 계획이나 하고 있었던 어린 아이가 하나 있는데, 안타깝게도 이 아이는 어느 한 어른의 이기적인 무언가 때문에 피해를 입은 탓에, 그 어른에 대하여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모습을 얼굴과 어깨와 다리와 눈빛으로 온갖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 이 상태 그대로를 설명한 것이다. 어느것도 아니고, 그대로. 하지만 ..
소녀가 이동한 곳은 다리였다. 옆 마을과 잇고 있는 짧은 다리. 그러나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곳. 소녀는 이곳에 와서 노을에 어두워진 내천 아래를 바라보았다. 예전엔 이곳에서 낚시도 했었는데. 만화에서처럼 장화를 낚아 보고 싶었거든.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런 일은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 않아도 매일이 재미있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왜 하나도 즐겁지 않을까. 바람이 선선하게. 눈가를 스쳐지나가는 그 바람결에 그리움을 담고 보냈다. 소녀의 오늘 하루는 그렇게 조용하고 지루하게 흘러갔다. 내일은 그를 볼 수 있을까.
노을이 지는 어느 날 오후. 시간은 5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소녀 G는 그를 만나지 못한 채 공원 옆 놀이터에 있는 외로운 그네를 타고 있었다. 평소같았으면 활기차게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탔겠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흥이 나지 않는다. 언제나 옆에 있어주었던 M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공원 주변을 걸어다니며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오늘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발로 살짝 밀어가며 조용히 그네를 타는 소녀는 침울했다. M이 나타나지 않아 심심했다. 심심했고, 조용했다. 예전엔 이런것도 괜찮았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이 조금 싫다. 노을이 지는 어느 날 오후. 우울하게 들려오는 까마귀 소리. 적막함이 너무하다. 이런 날도 있다. 그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싫다. 알고 있어도 싫은걸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