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文]
일식이 일어난다는 뉴스가 있던 날이었습니다. 저와 소녀 G는 어느 한 공원에서 만나 그 일식을 함께 보기로 했죠. 소녀는 일식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 일식이 너무도 기대가 된다고 했습니다. 비록 부분만 가려지는 부분일식이었지만, 세상의 정밀성이 돋보이는 현상인 만큼, 기대에 가득 찬 눈은 반짝였습니다. 때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3분만 지나면 일식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준비한 셀로판지와 용접 마스크를 각자 들고는 조용히 태양이 잘 보일만한 곳에 돗자리를 깔고 누웠습니다. 바싹 마른 햇빛이 따스했기 때문에 기분이 붕 들뜨는 것 같았습니다. 주변은 옅은 수채화같이 눈 부셨고, 그렇게 하늘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얼마 남지 않았대." 문득, 정말 문득, 옆에 함께 누워있던 새..
소녀와 소년 이야기. 비가 내려서 밖에 나가지도 못한 탓에, 소녀는 소년을 만날 수 없었다. 눅눅한 반 투명 커튼이 회색빛. 구름 낀 하늘에선 그저 비만 쏟아진다. 음악을 들어볼까 하고 라디오를 켰는데, 왜 사람들은 이럴 때 모두 우울한 발라드만 듣는건지. 소녀는 라디오를 껐다. 소년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 어제까지만 해도 낮에는 선명한 파란색과 새하얀 분홍빛 벚꽃이 흩날렸었는데. 꽃 구경하자고 약속 한 후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확인한 날씨는 '앞으로 비'였다.아뿔사. 괜스레 핸드폰 한번 들었다가 놨다가. 다시 들었다가 이내 주머니 속에. 소녀는 진작부터 핸드폰을 쥔채 기다리다 지쳐 잠 들었다. 마음 하나 몰라주는 하늘이 밉상인 하루. 소년과 소녀는 만날 수 없었다. ◇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 용기를 낸 ..
G와 M의 낮잠. 나, 소녀 G는 오늘도 M을 만나러 사뿐사뿐 걸어갑니다. 발끝을 스치는 싱그러운 풀들에서 사르르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가 끊길 때에 발걸음을 멈추어 고개를 돌리면 언제나 그곳엔 공원의 입구가 보이지요. 어둑한 나무의 그림자와 그 나무들의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을 바라보며 나는 발을 옮깁니다. 지저귀는 새의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가, 나의 길을 앞서 갑니다. 나는 저 맞은편 하얗게 보이는 너머로 서서히 다가갑니다. 이내 그 하얀 빛에서 하늘같이 파란 물을 뿜는 분수를 만나게 됩니다. 나는 그 분수의 끝자락을 바라봅니다. 주위를 두리번 거려보면 벤치에 앉아 눈을 감은채 자고 있는 남자 M을 만나게 됩니다. 반곱슬머리를 적당히 길러놓은 머리는 볼때마다 묶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됩니다. 하..
날씨는 점점 뜨거워지고, 주변의 공기가 새하얗게 데워져 아지랑이가 피어 올라오는 것을 맨 눈으로 보노라면, 어김없이 선선한 바람을 타고 소녀가 등장한다. 물론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소녀가 서 있다는 뜻이지, 정말로 바람을 타고 날아온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스크림 사줄거야?" 대뜸 소녀 G가 말했다. 대형마트에 들어가는 것을 그렇게나 싫어하던 소녀는 저번에 내가 무사히 들어갔다 나온 이후로는 조금 경계심이 사라진 것 같다. 물론 스스로 들어가지는 않지만 적어도 내가 물건을 사러 가는 것에 대해서는 극심하게 화를 내지는 않고 있다. 비록 얼마 전부터 있게된 아주 약간의 변화일 뿐이지만. "아이스크림?" "나 그 단팥 좋아해. 아이스크림도 먹고 단팥도 먹어서 이익 보는 기분이야." 게다가 설탕이 안 들어갔..
인생사 피카레스크.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고 나는 믿는다. 일반적으로 옴니버스라고 알고 있겠으나, 사실 용어 사용이 잘못된 것이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자주보는 애니메이션은 같은 인물이 다른 이야기로 매 화를 채워간다. 1화에서는 넘어지는 차이카, 2화에서는 물러터진 귤을 보고 화를 내는 카네, 3화에서는 이 둘에게 화를 내는 화투카가 나온다고 해도, 1화나 2화나 3화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어차피 '마니마가'라는 작품 내에서 언제나 등장한다. 1화에서도 세명은 기본으로 나와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인공이니까. 따라서 이것은 옴니버스가 아니라는 것이야.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샬록홈즈 시리즈도 피카레스크. 절대 옴니버스가 아니다. 공기는 투명하게 맑아 깨질 듯 하면서도 너무도 높아서 손에 닿을리 ..
스맙폰-예전엔 핸드폰으로 불렀지만-의 경우는, 자체적으로 AI를 슬리핑 시켜두는 기능이 있다. 이 기능을 사용하면 나노바이러사이의 공격을 피할 수 있다고 한다. 좀 더 강력한 녀석이 아니라면 안심할 수 있대. 응. 강력한 녀석이 아니길 바라.. 스맙폰은 연락을 위해서 일부러 캡슐에 넣지 않았다. 일단 밖에 계시는 어머니 아버지께도 전화해서 상황을 알려 드렸고, AI들을 피신 시키는 무척이나 착한 일을 했으니 케이크 꺼내 먹어도 되냐고 여쭈어보았다. 그러나 냉장고에 부착된 AI를 떼어놓는걸 깜빡하지는 않았냐는 질문에 나는 입이 턱 막혔고, 그렇게 케이크는 보류 되었다. 으허엉. 냉장고 AI 떼러 가야지.. + 조용한 집. 거실도, 현관도, 안방도, 그리고 내가 바닥에 앉아 있는 이 방도 조용했다. 비행기가..
뮤시요에게서 텔링트윗이 날아왔다. '못난이'로 이름을 저장해 뒀었는데, 어느새부터인가 "이쁜이 뮤싱'으로 바뀌어 있다. 언제 내 폰을 건드렸지? 손 버릇 나쁘네, 이 아가씨.. 내용은 이러했다. [나 내일부터 일 주일간 32-8행성으로 여행 가. >ㅅ< 거기서 이번에 와일레비 롯츠 300년 기념 파티가 열리거든. 아, 그래. ㅡ_ㅡ 근데 완전 좀 짱나는 일이 생겨버렸어. ㅜㅅㅠ 내 사랑스러운 보르졸에게 심어놓은 AI가 일반 대중에 시판 된 제품이 아니라고 아토믹텔레포터에 탑승이 불가능하다는거 있지? 그 안에 든 정보까지 읽혀져서 제품의 기술력이 도용이 될 수 있다면서 말이야. 나 참. 그런거 개발하라고 우리 집에서 자금 대 주는건데, 얘네는 도대체 뭐 하나 몰라!! 어휴!! 뭐 아무튼간에 그렇게 되서 내..
"아오, 저 예쁜 얼굴들." 그 부잣집 아가씨가 하교를 같이 하자고 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미천한 서민 취급 당하던 나는 사실 이 아가씨와 친한 친구로 되어있다. 이 녀석은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미묘하지? 응. 나 지금 기분 정말 미묘해. 그런 미묘한 아가씨와 길을 걸으며 유리맛 사탕을 핥아 먹는 하교 길. 문득 그 아가씨가 한마디 툭 내던진 말이 고작 저것이다. "뭐라구요?""아오, 저 예쁜 얼굴들이라 했어요.""왜 존댓말이야. 짜증나게.""...너, 너!! 나한테 그렇게 말 할 수 있어?! 서민주제에?!!" 노발대발. 아름다운 웨이브 진 금발이 찰랑. 분홍색 머리띠. 전형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유리맛 사탕 내 놓으라 화 내는 뮤시요를 발길질로 떨어뜨려 놓고는 그대로 다시 갈 길..
하루는, 같은 반에 있는 어느 부자 집 아가씨께서 내 자이로를 보고는 콧방귀를 뀐 적이 있다. "그게 뭐니? 자.. 자이로드롭이었던가? 그런 구시대적인 물건을 가지고 놀다니. 게다가 뭐야. 거기다가 AI볼을 껴 놓았네? 아주 즐거운 모양이구나." 호호홋, 입을 가리며 웃는 그 아가씨는 자신의 어깨에 서 있는 앵무새에게 키스를 했다. 내가 알기로는 저 앵무새 머릿 속에 AI칩을 심어놓았다고 한다. 덕분에 인간의 지능만큼 지능이 향상 되었다고. 이 아가씨라는 녀석이 이 곳에 전학을 왔을 때부터, 우리반 학생들은 그 앵무새와 그런 아가씨에게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아무래도, 생명체의 머릿 속에 AI칩을 이식하는 일은 무척이나 돈이 많이 들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AI가 세계 곳곳에서 빛을 뿌리고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