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

2012. 7. 3.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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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와 M의 낮잠.


 나, 소녀 G는 오늘도 M을 만나러 사뿐사뿐 걸어갑니다. 발끝을 스치는 싱그러운 풀들에서 사르르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가 끊길 때에 발걸음을 멈추어 고개를 돌리면 언제나 그곳엔 공원의 입구가 보이지요. 어둑한 나무의 그림자와 그 나무들의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을 바라보며 나는 발을 옮깁니다.


 지저귀는 새의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가, 나의 길을 앞서 갑니다. 나는 저 맞은편 하얗게 보이는 너머로 서서히 다가갑니다. 이내 그 하얀 빛에서 하늘같이 파란 물을 뿜는 분수를 만나게 됩니다. 나는 그 분수의 끝자락을 바라봅니다.


 주위를 두리번 거려보면 벤치에 앉아 눈을 감은채 자고 있는 남자 M을 만나게 됩니다. 반곱슬머리를 적당히 길러놓은 머리는 볼때마다 묶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됩니다. 하지만 M은 어째서인지 그걸 허락해 주지 않아요.

언제나 나른한 듯한 그의 눈매는 그냥 조금더 자게 놔둘까 하고 고민하게 하지만, 이내 나 자신이 심심한 탓에 그를 불러 깨웁니다.


 큰 소리를 외치면 언제나 이 공원에서 편히 쉬던 새들은 하늘로 날아갑니다. 하지만 그런 소란한 '숲 속'과는 정 반대로, M은 차분하게, 아주 차분하고 조용히 눈을 뜹니다.


천천히 고개를 들고, 천천히 손을 들어 눈을 비빕니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졸린 눈으로 나를 바라봅니다. 바람은 살랑살랑. 나무사이로 내리는 빛과 그림자는 남자의 주변에서 반짝반짝 흔들립니다.


 "아아.. 이제 왔구나."


 평소보다는 조금 늦었군, 남자는 하품하며 말했습니다. 나는 뒷짐지며 신나게 말했습니다.


 "밥 먹고 왔어."

 "뭐 먹었는데?"

 "근처에서 스파게티."

 "와 그거 맛있었겠네."

 "별로. 인스턴트거든."

 "와 그거 맛있었겠네."

 "응. 인스턴트 주제에 맛있었어."


 다시한번 남자는 하품을 뱉었습니다. 기지개를 펴는 그의 옆에 살포시 앉아서 새하얗게 더운 양지 속 분수를 보았습니다. 이내 팔을 툭 떨구는 M을 바라보았는데, 그는 여전히 목을 좌 우로 까딱 거리며 힘겨운 듯이 신음을 내었어요.

 나는 말했습니다.


 "잠은 집에서 자는거야. 그것도 밤에."

 "응. 알아."


 뒷머리를 긁는 그. 하지만 말은 이어집니다.


 "네가 낮잠의 달콤함을 몰라서 하는 말이겠지만, 뭐, 이해 해 줄게."


 나는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 했습니다.


 "낮잠이 달콤해?"

 "특히 여기는 바람도 시원하고, 적당히 어둑한데다가, 의외로 사람도 지나가지 않거든. 낮잠 자기에는 딱인 곳이지."

 "낮잠이 달콤해?"

 "여기에만 앉으면 정말 잠이 스르르 오거든. 네가 아직 어려서 그걸 잘 모르나본데, 언젠가 그 맛을 알게 될거야."

 "낮잠이 달콤해?"

 "시끄러. 혀로 느끼는게 아냐."


 눈썹을 치켜드는 그의 표정. 이 표정을 나는 무척 잘 알고 있습니다. 귀찮을때 짓는 표정입니다. 그치만 난 역시 궁금합니다.


 "낮잠이 왜 달콤해?"

 "맛이 달콤하다는게 아니야. 아 정말이지, 얘는 국어가 안되는건지, 이해력이 고차원인건지."


 다시 한번 머리를 긁고는 벤치에 기대며 한숨을 한입 어푸. 그리고는 늘어지게 손을 들며 한마디 툭 꺼냅니다.


 "있잖아. 여기는 정말이지 방심하면 잠이 온단 말이야. 이걸 네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음. 기다려봐. 음. 

 예를 들어서, 고양이는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러주면 코 하고 자는거 혹시 아냐? 딱 그 느낌이야.

 정말 무심결에 잠이 들어. 깊은 고민에 빠져 있어도, 또는 아무 생각없이 하늘을 지나가는 구름을 세다가도. 그러다가 '아아-' 하는 사이에 정신을 놓는달까.

 아니 이게 아닌데. 뭐지? 낮잠이 왜 달콤한거야?"


 평소에도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남자가, 오늘도 어김없이 맹한 표정을 짓습니다. 한번 두번 심심한 탓에 벤치에 앉은채로 발을 왔다갔다.

 그러다가 문득, 아주 문득 떠오른 한가지 아이디어.


 "내 콧잔등 문질러봐."

 "네? 아니오. 됐어요. 넌 고양이가 아니잖아."



 

 ***



 도대체 낮잠의 달콤함은 무엇일까? 나는 계속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오겠다고 말한 M이 마트에 갔다온지도 벌써 10분은 지났습니다. 오늘도 단팥이 들어간 하드는 맛납니다.

 그러다가 M에게 물었습니다.


 "아이스크림보다 달아?"

 "아니 그니까 그런 달콤함니 아니라니까?"


 나무막대기를 씹다가 다시 고개를 홱 저으며 남자는 인상을 구겼습니다. 역시 귀찮은 표정을 짓습니다. 난 이런 남자의 표정이 귀찮습니다.



 ***


 꽃이 바람에 흔들려 얼굴을 이쪽 저쪽으로 기울이면, 나도 따라서 한번 왼쪽 오른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봅니다. 아마 이 꽃들도 분명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겠죠.

 뒤에서 M이 뭐하냐고 묻긴 하지만,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꽃을 쳐다보았습니다. 남자의 얼굴은 어딘가 실증이 난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그 남자는 꽃이 아니니까 실증이 나는건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분명 머릿속에 생각하기 싫어하는 게으름뱅이 벌레가 살고 있을 겁니다.

 심심해지는 것이 싫어서 나는 다시 M에게 다가갔습니다. 


 "놀아줘."

 "응. 아냐. 아니지. 이런 날은 낮잠 자야 해."

 "난 낮잠 자봤자야! 달콤한게 뭔지도 모르잖아! 이익이 없다고! 시간 아까운건 가장 싫어!"

 "노는건 시간 안 아까운가보네?!"

 "아니, 그것도 조금."

 "아깝다는건 아는구나.."


 바람은 왼쪽에서 불고, 꽃들도 나뭇잎들도 모두 바람타고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는데, 이상하게도 M만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입니다. 모두들 흘러가는대로 흐르는데, 남자는 그렇지 않는 모습이 나는 이상했습니다. 아까 봤던 개미들은 어느쪽으로 고개를 돌렸으려나.

 돌연 남자가 말했습니다.


 "여기 앉아봐."


 손을 툭잡아서는 옆으로 당겨 억지로 앉혔습니다. 그치만 나는 거리감을 두고싶어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옆 벤치로 건너 앉았습니다. 남자는 허어, 이해 못할 반응을 보이더니 이내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나 따라해봐. 먼저 눈을 감고 그 상태에서 햇빛을 보는거야. 아마 나뭇잎 때문에 햇빛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할거야. 그리고는 귀로 새 소리를 찾아봐. 바람소리 때문에 찾기 어려울걸?"

 "응."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해 보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하는 말이 무척 바보같다는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았는데 어떻게 햇빛을 볼 수 있나요? 가끔 M은 도통 이유모를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걸 자주 느낍니다. 멍청이 M. 재미없다면 막 소리치며 화낼 겁니다.


 M의 말대로 눈을 감았습니다. 숨을 깊게 한번 들이쉬고 다시 깊게 내쉬면서 벤치에 기대어 고개를 젖히면 바로 위에서 나뭇잎들이 나부끼며 빛과 그림자를 어지럽게 흔듭니다. 조금 거슬렸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계속 해 보았습니다. 

 이상하게도, 난 분명 눈을 감았는데도, 어째서인가 새까만 '앞'은 전혀 새까맣지 않았습니다. 밝은 달걀색이 앞에 있습니다.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천천히 움직이기도 하고 빨리 움직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것이 빛이라는것을 단번에 알아차렸습니다. 왜냐하면 앞에 보인 그 밝은 살구색이 무엇인지 궁금해 눈을 살짝 떴을 때 눈부셨기 때문입니다. 으앗 하고 소리 쳤습니다.

 이상한 살구색. 나는 좀 더 그것을 보기로 했습니다. 또다시 이리저리. 하지만 전혀 눈이 아프지는 않습니다. 어깨에 힘이 풀려가는것이 느낄정도로 매우 편안한 움직임이었는데, 그 이유인지는 몰라도 눈두덩이 따뜻했습니다. 


 "이상해! 이상해!"


 나는 소리쳤습니다.


 "...뭐가?"


 저 멀리에서 M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어서 그를 볼 수는 없지만, 나는 그래도 말했습니다.


 "눈이 따뜻해!"

 "응. 눈이 따뜻해. 나도 그래..."


 남자는 대충 대답하는 듯 목소리에 힘이 없었습니다. 그치만 나는 진지합니다. 때문에 조금 기분 나빴습니다.


 이때 떠오른 M의 말. 이번엔 새 소리를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공원으로 걸어오기 전에도 새의 지저귀는 소리는 이곳 저곳에서 상큼하게 들려왔습니다. 하지만 아까 내가 소리치는 바람에 새들은 더이상 이 나무들 사이에 있지 않을겁니다. 

 바람이 불고, 머리카락을 빗겨 스치는 것을 느낄 때면 언제나 귀가 살짝 간지럽습니다. 하지만 그 시원한 바람은 언제나 기분이 좋습니다. 소곤소곤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들려주면서 바람은 지나갑니다. 때때로 그 소리가 멀리서도, 아니면 엄청 가까이서도 들리지만, 오늘은 마치 M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습니다. 그때, 파랑새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파랑새는 원래 없는 새라고 M이 말해줬지만 M은 바보입니다. 분명 TV에서도 파란색의 깃털을 가진 새가 있었으니 말입니다.

 바람 속에서 바로 그 새의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나는 놀랐습니다. 이건 말도 안돼!


 "새 소리! 들렸어 새소리!"


 나는 다시 소리쳤습니다. 여전히 눈은 뜨지 않기로 합니다. 눈을 뜨면 또다시 눈이 부실 테니까요.

 하지만 옆 벤치에서는 M의 목소리는 커녕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눈가는 따스하고, 귀로는 파랑새의 노래가 들리는데, M의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저 누군가가 숨을 쉬는 소리가 파랑새의 소리와 함께 들려오고 있을 뿐입니다. 안정된 호흡소리가 부드러워서 나도 맞춰 숨 쉬어보기로 했습니다.

 숨을 들이쉬고, 아주 천천히 내 쉬고.

 아주 천천히 들이쉬고, 숨을 내 쉬고.

 

 숨쉬고. 내쉬고.


 숨... 쉬고... 내ㅅ....




 ***


 꿈에서 남자가 "야!'하고소리 쳤습니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불쾌한지 깨달았습니다. M은 잘도 이렇게 방해하는 나를 용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건 전혀 좋지 않습니다. 방해는 정말 나쁩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단지 꿈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귀로도 M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살짝 소리가 흐리고 울리지만 이내 깨끗해지고 말았습니다.

 무거운 눈을 뜨고 앞을 보니, 옆 벤치에 앉아있던 M이 앞에 서 있었습니다. 나는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습니다.


 "거봐. 너도 낮잠 잘 줄 알았어."


 M이 말했습니다. 그제서야 나는 낮잠을 잤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한순간 온 몸에 녹아든 초콜릿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주변은 온통 노을로 노랗게 물들었는데, 내 기분도 그렇게나 진하게 녹아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달콤함'이라는것을 알았습니다!

 와아! 나는 소리 쳤습니다. 그리고는 환호했습니다.


 "나 낮잠이 왜 달콤한지 알았어!"


 그 말을 듣자 잠깐 이상한 녀석 쳐다보듯 바라보던 남자는 이내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치! 낮잠 짱이지! 아 드디어 내 기분이 전해졌구나. 이래서 낮잠은 좋은거야."

 "응. 뭐랄까, 그, 단팥 하드보다 더 달아."

 "...맛으로 표현되는구나, 너는."

 "와 되게 치사하다! 맨날 이런 낮잠을 혼자 독차지 했었다니!"

 "이건 독차지 할 수도 없는거야!"


 남자는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나는 벤치에서 뒤돌아 내 바로 앞에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꽃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여전히 꽃들은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습니다. 꽃들은 아직도 모르나봅니다.


 "내가 이겼어. 나는 낮잠이 얼마나 달콤한지 알았다구."


 너희들은 평생 모를거야, 하고 나는 말해주었습니다. 남자가 옆에서 이해안될 소리를 한다고 한 것 같지만, 나는 상관 없습니다.

 오늘은 정말 기념할만 합니다. 정말 엄청 달달한 낮잠을 자고 말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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