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cil 5

2015. 3. 17.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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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참 비도 내리기도 하고, 지금은 바람이 불고.

 그런 매일의 자연을 도시 속에서 조금이나마 느끼기 위해 나는 산책을 한다. 다들 공장이나 작업소를 증설하는 탓에 요즘 여기저기 구석에서 말도 안되는 냄새가 피어 올라오는걸 떠올리면, 머리는 지끈거리고 화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쓰고 있는 양산은 모두 그런 곳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쩔 수 없어. 이름 있는 가내수공업품은 모두 하나같이 자기들을 사는 조건으로 도둑들 마냥 지갑을 털어가는걸. 내 수준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사치이다.


 다른 뜻은 아니지만, 난 이 양산으로도 충분하다. 현실적 타협이라는 말이 그리 나쁜건 아닐 것이다.





 ....현실적 타협, 이라는 말에서 생각난 것이 있다.





 난 모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내다볼수 없는 미래'를 좋아하지 않는다. 도전을 좋아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는 다음 단계를 싫어한다. 무언가 하나라도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설령 그것이 내가 엉엉 울게 될 결말이라 하더라도, 나는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놀라서 펄쩍 뛰어 오르는 것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차 추돌 사고같은 갑작스러운 것들을 당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난 걱정이 많다. 이러저러 일들, 누군가 내게 보낸 편지 한 장에 적인 여러 글들 중 유독 돋보이는 한 두마디의 단어. 아주머니의 심기, 아저씨의 미소. 이러한 것들 하나하나에서 상상을 펼쳐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그렇게 나 자신을 피곤하게 만든다 해서, 그에 따른 결과들이 좋은 것들이 많은 것도 아니다. 

 가령, 

 더글러스가 어제 오전 일찍부터 나가서 지금까지 들어오지 않았는데,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제 점심은 먹었을까. 오늘은 어떨까. 먹었다면 누구와 먹었을까. 혼자 먹었을까. 지금 걷고 있을까? 어디서 누구와? 또는 무엇을 하며? ...이런 것들.

 내게는 여러모로 피곤한 것들 뿐이다. 더글러스가 누군가와 친하게 지내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겠지만, '만약 그 사람이 여성이라면?'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고 만다. 그런 생각에 창피해진 나는 애써 침착해려고 버둥거리기도 한다. 그가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해도 나는 무어라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니까. 난 그저 그와 함께 지내는, 그의 세계 내에 자리한 '한 사람 1'일 뿐.


 다만, 어찌 되었든 함께 지내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잖아.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럴 뿐이다. 우린 가족처럼 지내니까. 

 가족처럼 지내는 사람은,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남녀의 연애와 같은 이상적 바람을 원하기에는 내가 너무 모자라다. 때문에 그런 생각은 생각 조차도 하지 않는다.

 그냥, 그, 그 사람 인생이라는 조각에 내가 조금 차지 하고 있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걸 확인하고 싶을 뿐.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 모든 것들은 내 세계 안에서 일어난 '타협'의 울타리에서 일어난 요동일 뿐이다.

  부드러운 바람은 몇년 전에도 지금도 부드러운 바람이고, 난 그 바람에 위로를 받아 기분이 좋아질 뿐이다.



 자주 가는 서점을 앞에 두고 나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뒤를 돌았다. 이제 집에 가자. 산책은 이쯤에서 그만두자. 한번만 더 기웃 거리다가 서점 아저씨와 눈을 마주치게 되면 분명 신고 당할 것이다.

 주황빛 노을이 아름답다. 산책로가 예쁘다. 잔디가 바람 따라 일렁이고, 그 소리가 시원했다. 맨 발로 걸어보면 분명 기분은 좋을 것이다. 나중에 여기에서 점심을 먹어봐야겠다. 샌드위치를 싸 오면 되겠지.


 다만 혼자 오는건 사양이다. 아주머니나 아저씨를 모시고 올까. 

 더글러스는, 이런 내 계획을 이야기 해 주면 선뜻 오려 할까.

 웃으면서 그러자 해 줄지, 아니면 미안하다며 무뚝뚝하게 사양할지.


 "....."


 이렇게.

 전혀 이유도 없고, 근거도 없는. 그런 불안한 미래만 상상하다가 나는 내 감정을 다 소모해 버리고 만다.

 어깨가 아프다.



 "하압!"

 나는 기운을 차리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허리를 폈다가 구부리기를 반복하고, 심호흠을 반복했다.

 난 분명 지금 지쳐있을 뿐이다. 내가 삶을 사는 방식이 너무도 비효율적이라서 그럴 뿐이다. 집에 가서 책을 읽어야겠다. 분명 사랑은 '하는 것'이라 했으니, 사랑하는 방법을 다시 찾아보도록 하자. 시간을 초월한 그녀의 사랑 이야기. 그것이 내 지침서니까.




 새삼 고개를 들어 주변 사람들을 보았다. 하나같이 모두 새까맣게 타버린 숯의 검댕이였다. 그 모습이 너무도 웃겼다. 누군가가 캔버스에 사람이라 우기면서 숯으로 선을 찍 그어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새까맣게 보이는데 사람이라니. 

 인식은, 이렇게나 보이지 않는 것에 의존해 있다.


 돌아가는 길이 사뿐사뿐. 가벼운 구두 소리는 내 발소리였다.

 나는 오늘도 웃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생각을 좀 바꾸기로 했다. 난 그저,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을 하면 될 뿐이라고.

 이 싸구려 양산이 지금 내게 해 줄수 있는 일을 해 주니까, 나는 이 양산을 외출할 때마다 항상 들고 나가잖아. 애정을 가지고 있잖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그렇게 눈에 보일 날이 오겠지.

 내가 어떤 가치와 신분으로 이곳에서 살아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사람이라 생각한다, 더글러스는. 그런 것으로 나를 판단하지 않으리라 본다, 더글러스는.

 그는 내가 그에게 나타내고 해 주는 일들로 나를 판단할 것이다.

 내 본심을 파악하고, 나를 이해해 줄 것이다.



 나는 웃었다.

 오늘의 나는 너무 감성적인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몇달 전까지만해도 하루하루 먹고 살아가기만을 고심했었는데. 상황은 그때와 비교해서 별로 좋아진 것도 없는데.

 나는 오늘 어떻게 이렇게나 감성적이 되었을까.


 "안녕, 내 남자. 평안해야 해요, 당신은."


 그 책에 있던 한 줄을 읊어보았다. 

 창피했다. 어서 집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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