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cil 4

2015. 3. 3.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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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시간을 초월하는 듯한 여러 통의 편지를 남긴 여성이 자신을 감옥에 가둔 남자를 그리워하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그녀는 어떤 숲숙 깊은 곳에 위치한 저택에 끌려가 살해 당했고, 그런 참극을 당하기 바로 전에 남자를 위한 편지를 그 저택 어딘가에 숨겨놓은 것이다. 세월이 흘러 남자는 그 저택을 소개 받아 살게 되고, 그곳에서 그 여성의 편지를 찾게 된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 집에서 당장 나오세요.」


 하지만 그 남자는 그 편지를 읽고 난 후에 살해 당하게 된다. 여성이 걱정하던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경찰은 그 곳에 백골화 된 시체를 조사하며 이야기를 파해쳐가기 시작했다.

 ……그런 전개로 시작되는 소설이었다. 형사는 그 자리에서부터 시작되는, 단서들이 제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그 여성이 남자에게 남긴 사랑과 그리움이 남아있는 편지를 찾아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선견지명으로 그 남자의 모든 인생을 꿰뚫어보고 있었음을 놀랍게 증명하고 있었다. 똑똑한 여성은 섹시하다. 그러나 그녀는 겸손했다. 그녀의 눈가는 언제나 빛이 났을 것이며, 그녀의 마음은 언제나 꺾이지 않았을 것임에 틀림 없다.

 소설을 천상 가짜일 뿐이다. 그러나 내게 남은 인상은 그녀가 역사적인 한 획을 그은 인물에 버금갔다.


 이 책을 최근에 완독한 건 불과 몇 달 전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살고있을 때부터 읽었던 책이다. 읽어도 읽어도 재미있는 책이었던 만큼, 시간의 사이사이가 무의미하지 않도록 이러저러 일을 알차게 처리해 나가는 내 영혼이 조금 매말라가는 것을 느낄때 즈음 나는 마치 배고픔을 느끼는 어린아이처럼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오게 된다. 그곳에 앉아서 마음 편하게 책을 읽을 여유는 없었기 때문에, 집으로 가져와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조금 여유를 즐길 때에 펼쳐보곤 했다. 짧은 시간 짧은 부분을 읽을 뿐이었지만, 휴식은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오후의 또 다른 일들을 해 나가는데 도움을 준다.

 왜일까. 대체 어떤 부분에서 그런 힘을 얻는 것일까. 단순히 현실을 잊고 잠시나마 여성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드라마틱한 인생을 사는데서 오는 카타르시스 때문일까. 그러나 여성은 죽었다. 이미 죽어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가 남자를 생각하며 이루어낸 수 많은 행동의 원동력 - 즉 사랑 - 을 동경한 것일 터이다. 그녀의 그런 헌신적인 사랑, 나도 해 보고 싶다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것도 조금은 말이 안 된다. 난 이 책을 어렸을 때부터 읽었고, 어렸을 때부터 그런 어른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리 없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의 나는 그리 조숙하지 않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무릎도 많이 까지고 그랬으니까.




 이 책을 다시 보게 된건, 더글러스가 도서관에서 그 책을 빌려오며 집으로 돌아올 때였다. 해가 점차 기울어져 가고 있는 시간, 시장에서 과일과 빵을 사 오는 와중에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한 손은 양장본으로 된 붉은 색의 그 책을 감싸 안은 채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구두소리는 다른 구두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싸구려임에도 불구하고, 그 묵직한 울림이 특별했다. 어디서 들려오든지, 나는 그 소리를 분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만큼, 나는 이 소리를 좋아한다. 차분한 그 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한다. 그런 그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을 들고 있다. 취향이 같은 걸까, 아니면 그는 아직 그 책을 읽지 않은 것일까.

 나는 약간 빨리 걸어 그의 앞에 섰다. 약간의 인사를 나눈 후 우리는 집 쪽으로 나란히 걸었다. 길가가 눈 부시게 빛나고, 꽃이 흔들리는 가벼운 바람이 시원한 초저녁. 나는 그가 읽게될 여성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그의 눈에는 그녀가 어떻게 보였을까. 나처럼 그녀를 좋아할까. 그렇다면 이 소설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기대되는 일이다. 언제쯤 다 읽게 될까.

 

 "이 책 읽어봤어?"


 그가 물었다. 여러가지 생각이 들자, 난 정말 기뻐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고, 내게 가끔씩 닿는 그의 시선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책의 이야기를 조금씩 말 해 주기 시작했다. 나는 즐겁게 그가 해 주는 이야기를 경청했다. 

 기쁘게도, 더글러스도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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