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니 편이 되어줄게

2015. 3. 3.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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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에 머리를 긁으며 헤드셋을 내려놓고 냉장고 앞으로 걸어가 꺼내든 찬 물을 마실 때, 그 물이 시원하게 목을 넘어갈 때가 있다면, 아, 오늘도 난 참 힘들었었구나 하고 문득 생각하게 된다. 나를 위로할 마음을 준비 하는 것이다. 

 워낙에 힘들었을테니까.


 여기저기 치이고, 주변 사람들은 내 말도 안 들어주고. 바람때문에 머리 헝클어지고, 블라우스에 커피 쏟고, 칠칠맞다고 부장님께 꾸중 듣고, 점심은 혼자 먹고.

 커피 타오라 시키고, 커피 진하다 꾸중 듣고, 내 머리카락 정리 안 되어 보인다고 묶으라 하고, 내가 안 그랬는데 복사기 망가뜨리지 말라 꾸중듣고.

 퇴근 시간 가까워지자 들 뜬 마음으로 시계 자꾸 쳐다보지 말라 하고, 회식 가자 하고, 술 한잔 더 마시라 하고.

 2차 가자 하고, 딸 같아서 아빠의 마음으로 술 한잔 더 마시라 하는거라 하시고.

 그러나 호응하는 마음으로 마시면 여자가 너무 마시는거 아니냐며 한마디 하시고.

 뒤집어질 것 같은 속을 참으며 호호 웃는 얼굴에 경직이 오고, 결국 모두 헤어지는 인사와 함께 각자의 길을 가는데, 내 몸에서 고기와 술 냄새가 나는 이 와중에 맞은편에 꽤 잘 생긴 남자가 있었고, 난 그 사람과 같은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려야 했고. 


 맙소사. 하루 종일 괴롭힘 당했던 것보다 버스정류장에서 함께 서있던 남자에게 내가 어떻게 보였을까 하는 것이 더 신경 쓰이는 밤이다. 설마 억울한 생각을 하는건 아니겠지? 아 이 여자 술 많이 마시는구나, 하고 오해하는건 아니겠지? 얼굴 들고 한번이라도 힐끗 쳐다볼걸 그랬나. 하지만 그가 내 옆에서 멀어지거나 하지는 않았으니 괜찮겠지.


 괜찮을리가.

 나는 한심하게 눈물이나 흘리고 있다. 오늘은 그리 짜증 나지도 않았는데. 오늘은 좀 잘 참고 그랬는데. 억울한건 언제나 있었는데. 어제까지 잘 견뎌놓고는 왜 오늘 또 이리 북받쳐 올라오는지. 속 쓰려서 찬 물 마셨는데, 왜 뜨거운 눈물이 나오는건지.

 혼자 산지 이제 막 1년이 지난 참이고, 이곳에 온지 3개월째에 느꼈던 상당한 고독감도 어느정도 이겨낼 수 있었는데, 아직 난 혼자 살 날이 더 많은데, 겨우 이런거 가지고 어느 누구에게 하소연 못한다 울고불고 난리 치면 어떻게 하나. 옆 집에서 시끄럽다며 벽을 두드릴지도 모른다. 한번 울면 목청껏 울어버리니까. 지금 이런 시간에 그랬다가는 큰일 날 것이다. 참아야 한다.

 코 흘리면서 울어본 것도 이젠 흔적 조차 희미한 먼 과거의 일이다. 나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컵에 물을 따른 후에 물통을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 컵을 들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헤드셋을 쓰고, 볼륨을 크게 틀었다.


 오늘은 안 하시려나.

 그분이 라디오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

 눈 감고 듣기만 하게. 편하게 듣기만 하게.

 말도 안되는 얘기를 재밌게 떠들기도 하고, 때로는 진지하게 무언가를 설명하기도 하는 그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새벽이라 기대하면 안되는걸까. 이미 주무시고 계시려나.


 나는 휴대폰을 들고는 문자를 보냈다.


 [오늘 라디오 안하시나요?]


 문자 찍는것도 힘겨웠다. 손가락 하나 하나 움직이기 버거웠다. 대체 무슨 용기로 문자를 보낸걸까. 이런 용기로 고등학생때 고백 한번 해볼걸 그랬다. 그런것도 경험이라며. 왜 난 그런것에 흥미가 없었던 걸까. 

 …왜냐하면, 그렇게 앞 뒤 생각 안하고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고 싶을 만큼, 난 지금 누군가의 온기가 그리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새삼 남을 평가하듯 생각했다. 학생 때는 아쉬운게 없었나보지.


 눈을 번쩍 떴다. 알람이 울렸다. 라디오가 시작되었다는 알람이었다. 정말이야? 모니터를 살펴보았다. 맙소사, ON AIR 표시가 빨갛게 들어와 있었다.

 이어서 문자가 왔다. 순간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어서 들어오세요 ^^]


 "말도 안돼!"


 DJ가 라디오를 하신다 답장을 보낸 것이다. 미쳤다. 당장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배경음악이 귀를 울렸다. 아직 아무런 말도 안 하고 계신다. 그런데, 음악이 너무했다. 가사가 너무했다.

 왜 또 날 울리는 노래를 들려주시는걸까.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울리고, 그 멜로디가 한껏 부드럽게 공기를 가라앉히는가 싶더니, 너무도 익숙하고 깊은 목소리가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가 평소엔 없던 소중한 시간을 준비한 것임에 틀림 없다.

 에이 씨. 눈물이 또 난다. 컴퓨터 책상 위로 팔을 올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기댄채 난 감상하기 시작했다. 볼수도 없는 그를 보듯 모니터 가까이로 얼굴을 가져갔다.


 오늘은 이 사람을 내 멋대로 애인으로 두고 지내야겠다.

 일방적인 진행의 대화였다. 그가 말하는데, 그가 들어주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들리지도 않을 목소리로 하소연이나 한마디 두마디 내던졌다.

 그가 선별한 음악들이, 마치 나를 향한 위로 같아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들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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