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 1,729,440

2019. 10. 11.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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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이 생각하나이다, 향초로 몽롱해진 이 밤중에도.

 

 

 

 

 

   새로 입은 카디건을 알아봐 준 건 미진 씨였다. 그는 반려동물에게 필요한 먹이나 물품을 판매하는 가게를 운영한다. 색이 바랜 듯한 느낌을 주는 낡은 스웨터로밖에 보이지 않아 어디 가벼운 편의점 같은 곳에 갈 때나 입으라면서 테라타가 멋대로 내 옷장에 집어넣고 가버린 옷인데, 그런 내막을 알지 못하는 미진 씨는 이 카디건이 내게 어울린다고 말했다. 어울린다는 말 자체는 기분 좋았다.
   이 이야기를 테라타에게 해 주면 녀석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눈이 동그래지면서, '그 사람의 감각은 내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는데'라며 힐난할 테지. 그렇게 할 정도야? 그냥 조금 독특하다고 하면 되잖아.

   처음 이곳은 그가 기르는 강아지 한 마리 외에는 동물이란 없는 펫숍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곳은 동물과 함께 사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반려 동물을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아 곧잘 떠들썩 해지곤 한다. 그중 몇 명은 내가 소개해 주기도 했다.
   이곳에서 카페처럼 음료를 파는 것은 어떤가 하고 스쳐 지나가듯 미진 씨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러려면 자신이 카페 일을 할 줄 알거나 그 일이 가능한 사람을 고용해야 하는 문제를 차치한다 하더라도, 현시점의 재정의 문제상 그렇게까지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가게 안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자기도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생겨서 좋을 것 같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아직은 뜻한 대로 이룰 수 없다고 하니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임시로, 이곳에 손님으로 찾아온 사람 몇 명이나마 앉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 하나 정도는 둬 보자는 식으로 타협을 보게 된 기억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실제로 나를 포함해 몇 명 정도는 정기적으로 와서 차 한잔 정도 마실 여유를 가지며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고양이가 먹을 캔을 몇 개 구입한 후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햇살은 여전히 따뜻한 것 같은데, 바람이 찼다. 시계(視界)에 가득 차는 공원의 모습. 그곳은 높은 나무들의 그림자를 가르는 햇살의 선명한 현들로 반짝였다. 10월에 접어들면서 붕어빵을 팔기 위해 아주머니와 아저씨께서 포차를 설치하는 모습을 본 바가 있다. 아. 겨울이 오고 있구나. 괜히 코 끝이 그 익숙한 냄새를 찾고 있었다. 바싹 구워진 짭조름하고 달콤한 냄새. 

   평소 고양이들이 모이는 공원 구석에 다다를 때 즈음, 그 자리에 누군가가 쭈그리고 앉아 고양이들과 점잖이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단발머리가 옆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목선은 선명히 드러났다. 그의 웅크린 모양은 조그마한 상아색 사슴을 연상케 했다. 
   고양이가 나를 알아채고는 눈인사와 함께 냥냥 울었다. 그도 내쪽을 돌아보았다. 찰랑이는 머리카락. 내가 먼저 말없이 인사를 건넸다.
   예상에 없던 타인과의 만남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더군다나 고양이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왔는데 나 때문에 방해받게 되면 그건 내가 원하는 바도 아니다. 그래서, 괜한 얽힘을 만들지 않기 위해 주의하면서 가급적 서둘러 비닐봉지 속에 든 캔을 꺼내 들었다. 이곳에 온 목적이 이것 때문이었다는 걸 빨리 눈치채도록 하면 이 사람도 덜 신경 쓰지 않을까 싶었던 이유였다.  

   캔들의 뚜껑을 따고 내려놓자 고양이 몇 마리가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조용히 웅크려 앉아있는 그녀는 고양이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고개를 움직였다. 계속 지켜봐 주고 계시니, 내가 굳이 그 옆에서 이 친구들을 지켜봐 줄 필요는 없겠지.
   고양이들이 캔을 다 비울 때까지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다. 나는 그 옆 조금 떨어진 곳에 놓여있는 벤치로 걸어가 앉았다. 

   

  스마트폰으로 책을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왔다. 그새 캔을 비웠나 하고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가볍게 벤치 위로 올라타고는 곁으로 다가와 몸을 부볐다. 그렇게 몇 번 접촉하고는, 잠시 후 등을 기댄 채 그 자리에서 몸을 말아 누워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가씨 한 명, 그리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울고 있는 고양이들. 감사하게도 오늘 이 분이 나를 간택하셨다. 웃겨라. 그냥 이유 없는 행동일까, 내 옆이 드디어 편해진 것일까 하는 섣부른 기대도 해 보고. 무언가 다른 게 더 필요했을까 하고 고민도 해 본다.

   "입맛이 없니?"

   손가락 끝으로 고양이 머리를 톡톡 쓰다듬어 주었다. 이 친구들은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가능한 대로 몸속 에너지를 채워놓을 필요가 있다. 길고양이들이 그 추운 기간 동안 어떻게 지내게 될 것인가 생각해 보면 당장이라도 집으로 데려가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여유가 없어 책임지기 힘겹다.
   테라타는 분명 데려오라고 하겠지만, 녀석도 나도 그렇게 할 만큼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니 분명 무리할 테지. 길고양이가 밥을 잘 안 챙겨 먹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동물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데, 반려동물로 집에 들이게 되면 얼마나 더 극진히 모시게 되겠어. 
   이내 녀석에게서 가르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말을 걸어온 건 이때였다. 

   "아이들 돌봐주신 지 오래되셨나 봐요. 잘 따르네요."

  시선을 돌려보니, 조금 마른 체형에 긴치마를 입어 더욱 왜소해 보이는 그녀가 서서 내려보고 있었다. 조용한 목소리와 나른해 보이는 눈매 때문에 그녀의 성격을 멋대로 짐작하게 된다. 나는 점잖이 미소 지으려 했다.

   "그렇게나 잘 해준건 아니에요. 그래도, 3년 정도 되니까 알아봐 주네요."
   "와아."

   나긋한 인상이 생긋 웃자, 눈매가 상큼하게 반짝였다. 등지고 있는 두 팔. 

   "정말 긴 시간 동안 돌봐주셨네요. 멋지세요."
   "그렇지도 않아요. 생각났을 때나 챙겨주는 거라 주기적이지도 않고."

   아가씨는 가지런히 자세를 낮춰 웅크리고는 벤치에 앉아있는 고양이와 시선을 맞추려 했다. 고양이는 눈을 감은채 몸을 말고 자는 것 같았다. 그림자 속 공원. 빛이 닿는 곳이 밝게 번져갔다. 고양이의 발 앞에, 그리고 아가씨의 머리카락과 어깨와 등에. 그리고 아마 나에게도.

   "옆에 앉을래요?"
   "아, 네."

   어느새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게 된 그는 고양이의 앞발에 선이 고운 자신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얹어보았다. 꼬물거리는 고양이가 다시 잠에 빠져들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이 공원에 있는 고양이들 중 몇은, 갓 태어난 새끼로 이 근처 건물들 여기저기에서, 구석구석에서 발견되었던 녀석들이다. 아려는 그 고양이들의 숨결을 분별할 수 있었고, 진심으로 사랑스러워했다. 파란 하늘의 6월 말에 태어난 아가들도 있었고 겨울의 새하얀 추위가 가시지도 않은 2월 초에 태어나 파르르 떨며 어미의 품속에 파고들어 잠을 자는 아가들도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어미는 건강한 아기만을 데리고 가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벌집 같은 멘션의 옥상 끝에 서서,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 지나자, 공원 구석에, 나름 배식소로 자리매김된 공간에 모여들었다. 어미를 따라 쫑쫑 걷는 아가들의 발걸음을 잊지 못한다.
   저 빌라에서, 이쪽 가게 뒤에서, 골목에서.
   테라타는 자신을 붙잡아달라고, 가서 만지고 싶다고 내게 매달리곤 했다. 과장된 감정 표현. 우리 테라타의 예쁜 점이다. 하지만 나는 테라타는 고사하고, 나 자신이 달려가려는 걸 꾸욱 참는 것만으로도 진을 다 빼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의 손에는 캔이 들려 있었다. 
   츄르를 사 오는 직장인들이 몇 있었다. 
   그리고 그 일행에 내가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 해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뺀 나머지 이야기는 가능한 만큼 들려주었다. 아가씨는 나와 그녀 사이에 고양이를 두고 벤치에 앉아서 그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들었다. 그때 찍었던 사진들도 몇 장 보여주었다. 와아, 은은한 탄성이 이따금 터졌다.  

   "그럼 이 친구도 그 아기인가요?"
   "워낙 아기 고양이들이 많았던지라, 다 기억하지는 못해서 모르겠어요."
   "와아."

   어느새, 식사를 다 비우신 다른 고양이들도 우리 앞으로 모였다. 몇은 바닥에 반짝이는 빛 부스러기들을 좇아 다니느라 바빴다. 한 마리는 벤치 다리를 붙잡고 서서 높은 나무 가지의 새어 들어오는 빛을 따라 보는 것 같았다. 몇 마리는 잠들었다. 

   약 3년 조금 더 된 시간 동안, 고양이와 우리들은 그렇게 지내왔다. 이 공원은 그런 우리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 사실이 내게는 기쁨이다. 미진 씨에게도, 내게도 이곳은 특별했다. 

   "저도 고양이들에게 무언가 주고 싶어요. 사실 혼자 이사온지 얼마 안 되어서 조금 쓸쓸하던 참이었는데."
   "어머. 그랬군요."

   나는 웃었다. 조금 이따가 펫숍에 가보자는 이야기를 건네었다. 그녀는 알겠다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루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으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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