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 26,664

2019. 7. 1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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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64

 

 

 

 

  재즈와 같은, 카페에 어울릴법한 음악이 지주에게는 취향이 아니기 때문에, 평소 집에 있을 때에는 틀어놓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오늘 밤, 조용한 피아노와 차분한 기타 연주를 중심으로 음악을 골라 들으며 차 한잔 하기로 한 것은 평소에 비해 조금 특별하기도 하다.

 

  밤 8시 22분.

  깊어가는 별 하늘.

 

  철컥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다녀왔어요, 외치는 케페 테라타. 작은 테이블 옆에 앉아 팔을 얹고 있던 지주는 점잖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체격 좋은 나방은 기분 좋게 활짝 웃어 보였다. 음악과는 참 어울리지 않는, 신나는 표정.

 

  "언니 언니. 가게에서 나 먹으라고 이거 줬어."

 

  한 손에 들려있던 하얀 비닐봉지를 앞으로 내밀며 신나게 말했다.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는 쿵쿵 걸어왔다. 바닥이 너무 잘 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스럭거리는 비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내용물을 꺼내 보이는 테라타의 손등이 눈에 들어왔다. 내용물이야 뭐, 가게에서 더는 팔기 어려운 것들을 조금 챙겨준 거겠지. 눈동자만 테라타에게로 돌렸다. 

 

  "어서 씻고 올래?"

  "응. 우리 뭐 먹을까?"

  "너 먹고 싶은 걸로. 냉장고에 소주 사 왔으니까 안주가 될만한 게 낫지 않아?"

 

  지주는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골랐다. 나방은 잠시 생각에 잠겨 보였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생각을 하고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냥 조금 망설였을 뿐이었다.

 

  "좋아."

 

  그러니 부정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럼 나머지는 내가 정리해 둘게. 어서 씻고 와."

  "그래 언니!"

 

  요란하긴. 지주는 생각했다. 다시 쿵쿵거리며 걸어 화장실로 들어가는 테라타의 등을 지켜보았다. 먹고 싶은 걸로 고르라고 해 놓고선 결국 자신이 골라버린 모양새가 되었다. 그래도, 테라타는 좋았다. 지주도 좋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음악을 껐다. 그리고는 나방이 가져온 것들을 냉장고에 넣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

 

  잔에 술 따르는 소리. 목을 살짝 적실만큼만 술을 머금고 잔을 내려놓는 지주. 남은 열 때문에 조금씩 기름이 튀는 작은 프라이팬. 잘 구워진 비엔나소시지.

  하지만 그저 구워내기만 한 건 아니다. 뜨거운 물로 살짝 데친 후, 간 마늘을 조금 넣어 살짝 볶아낸 식용유에 구워냈다. 마무리할 즈음에 꿀을 조금 넣어 두르면 끝. 그대로 프라이팬을 들어 냄비 받침을 둔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그 타이밍에 맞춰 화장실 문이 열렸다. 머리카락을 적당히 털어내고 나온, 청순하고 맑은 테레타의 얼굴.  맛있는 냄새가 기분이 좋았는지 나지막한 탄성이 이어졌다. 

 

  "아, 혼자 시작했어."

  "어서 앉아. 방금 꺼낸 거라 차가워."

 

  무릎 조금 위까지 올라오는 펑퍼짐한 반바지에 반 나시 티셔츠. 공기가 잘 통해서 좋다는 이유로 집에서 곧잘 이런 스타일로 쉰다. 그녀는 단숨에 테이블 의자에 앉아서 혼자 술을 따라 홀쭉 털어냈다. 머리카락을 잘 말리고 먹기 시작해도 좋을 텐데, 그렇게까지 참을 수는 없었나 보다.

  포크로 프라이팬을 가리키면서, 테라타가 말했다.

 

  "정확히는, 말리려고 했는데 이 냄새 때문에 당했어. 끌려서 바로 앉았다고, 여기에."

  "그렇게까지 맛있는 냄새는 아니지 않아?"

  "따끈할 때 먹고 싶었어. 아, 밖에서 밥을 먹고 들어오긴 했는데 이 정도면 지금 또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무리하지 마. 몸에 안 좋아."

  "아아. 아쉽다!"

 

  과장된 한숨을 쏟아냈다. 지주는 피식 웃었다. 

 

  "꿀이 들어가서 밥이랑 어울릴까?"

  "응. 이건 무조건 어울려. 단짠이잖아."

 

  테라타는 술을 한 잔 다시 따르고, 쭉 들이켰다. 혀가 쓴맛에 잠기고 곧이어 부드러운 목 넘김이 느껴지는 것 같더니, 이내 속에서부터 화한 기운이 쭉 올라와 얼굴이 구겨졌다. 눈을 뜨고 있기가 어려웠다. 다리를 가볍게 떨었다. 거친 날숨에 알코올 기운이 한 덩이 쏟아졌다. 코 앞을 손사래 치며 숨결을 흩뜨렸다.

 

  "소주 맞아? 너무 센데?"

  "센 소주인가 보다."

  "아, 그런가. 아고고, 하하하!"

 

  그녀가 호탕하게 웃었다. 

 

  "향은 어때?"

 

  지주가 묻자,

 

  "아. 향. 어, 향 좋다."

 

  테라타가 대답했다. 혼잣말하는 듯이. 술을 다시 한 잔 따르다 말고 소시지 하나를 찍어 먹었다. 그러다가, 못한 말이 있는 듯이 서둘러 입 속을 삼켜 비웠다. 

 

  "이거 어디서 마셔본 것 같은데? 소주에 이런 향기로운 게 있던가?"

  "고량주가 있지."

  "아아아────, 아 그러네! 언니야, 그거 비슷하다."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눈이 동그래진 그녀가 지주를 바라보았다. 입가에 술잔을 걸친 채, 입술이나 겨우 적실수 있을까 싶을 만큼 조금 머금은 술을 느긋하게 삼켰다. 지주는 웃었다. 맛있는 술을 찾아 기분이 좋았다.

  테라타는 알근한 술기운이 벌써부터 조금 기분 좋게 바뀌어가고 있는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피부는 방금 샤워를 마쳐서 시원한 상태인데, 몸속은 후덥지근했다. 나른해지는 기분. 곧이어 두 팔꿈치를 테이블에 걸쳤다. 

 

  "테라타."

  "응? 지금 나 불렀어?"

 

  돌연 지주가 그녀를 부르면서 눈이 마주쳤다. 규칙성 없이 흐르던 맹한 정신이 돌아왔다. 지주는 피식 웃었다. 

 

  "너무 막 부어 마신다 했다."

  "아냐, 안 취했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네, 네. 그래요. 자. 속 버려."

 

  언니라는 사람은 그녀의 입 속으로 비엔나소시지를 하나 집어넣어주었다. 기름 떨어질까 봐 두 손으로 입 아래를 받쳤다. 덥석 물었다. 벌꿀 향이 용케 사라지지 않고 입 속에서 풍겨졌다. 

  지주는 테라타의 오물거리는 볼이 귀여웠다.

 

  "아무튼, 테라타."

  "응, 언니야."

  "오늘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가벼운 주먹 쥔 손에 얼굴을 기대며 묻는 지주. 어깨가 한껏 들뜬, 귀여우신 테라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난 오늘 기분이 좋아."

  "왜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어."

  "그래?"

  "응."

 

  어깨를 살짝 스치는 단발머리 끝이 살랑거렸다. 뒤편으로 틀어놓은 선풍기 덕에 머리카락이 점차 말라갔다. 다소 헝클어진 머리를 가볍게 정리해 주는 부드러운 손길. 피하지 않았다.

 

  "하나는 집 오기 전. 사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이만 육천육백육십사 시간. 오늘은 또 오늘대로 한 줄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날이잖아."

  "그렇게 대단한 날이 아니잖아."

  "그래서 내가 기분이 좋은 두 번째 이유!"

 

  갑자기 허리를 들며 팔을 쭉 뻗으면서, 활짝 펼친 두 개의 손가락을 보이는 테라타. 지주는 그 손가락이 아니라 테라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런 대단한 날이 아닌 오늘을 위해 사 온 술. 아니, 술을 사 온 언니. 재즈 틀어놓고 나 기다려준 언니."

 

  배시시 웃는 바보. 지주도 따라 웃었다. 

 

  "재밌는 숫자가 되었으니까."

  "맞아! 언니는 그걸 어떻게 알았대?"

  "일기 쓰다 보면 알게 되던걸."

  "난 어플."

  "편리한 기능을 쓰시네."

  "머리가 나쁘면 어쩔 수 없어."

 

  테라타는 여기서 다시 술 한잔. 이번에는 무리하지 않고 반 잔만 따라 마셨다. 지주는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야 서프라이즈는 물 건너갔네."

  "언니야말로 서프라이즈는 너무 갔잖아."

 

  테라타는 낄낄 웃었다. 

 

 

 

 

 

  ∮.

 

  밤 10시 47분. 더 깊어진 별 밤.

  다시 현관문이 열렸다.

 

  "별일이구나. 이 시간에도 왁자지껄."

  "아, 언니 왔다!"

  "얘는 꽤나 마신 게야?"

 

  라온 언니가 구두를 벗으면서, 시원스레 웃으며 손을 흔드는 테라타의 상태를 물었다. 지주는 그저 눈 감은 채로 네, 맞아요, 그렇게만 대답했다. 라온은 그 둘을 번갈아 보았다.

 

  "내 잔은 남아있어?"

 

  라온의 아무 소리 없는 발걸음이 가까워지자 테라타가 벌떡 일어나서는 싱크대 상부장에서 술잔을 꺼내와 쪼르르 한 잔을 따랐다. 라온은 점잖은 손길로 건네받았다.

 

  "고마워, 아가."

  "수고했어요, 언니도."

  "너도."

 

  이어서 병을 들어 이번엔 테라타에게 한 잔. 지주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라온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들러도 시간 괜찮아요?"

  "그럼 그럼. 그리고, 너희 둘 보고 싶었으니."

 

  엄지와 검지로 잔을 감싸 쥔 채로 대답하고는, 코 끝으로 잠시 향을 맡아보던 큰언니는 한 모금 머금어 목을 축였다. 하지만 이 이상은 마실수 없어서 잔을 내려놓았다. 반만 받을걸 그랬나, 라온은 중얼거렸다. 지주는 피식 웃었다. 

 

  "조금 쉬다 가실 거면 갈아입을 옷이라도 꺼내드릴까요?"

  "그러다가 자다 가겠어. 요 며칠 조금만 더 참아야지 어찌 하겠니."

 

  테이블에서 의자를 끌어 앉고는 다리를 꼬았다. 라온은 그렇게 이만 육천육백육십사 시간의 두 동거인과 함께, 잠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이리하여, 맑은 여름 하늘에 펼쳐진 은하수를 따라 산책하던 아가씨가 지주와 함께하게 된 시간이, 그 하루가 한 겹 더 깊어져갔고, 거미와 나방이 같은 집을 사용하게 된 시간이, 그 하루가 더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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