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니바퀴 구르는 모래소리 (1차)

2014. 5. 7.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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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요없다고 말했는데도 굳이 가지고 와서는 시계를 분해하고 마는 모습에 나는 이마를 짚고 서서 그 모습이나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오전이다. 10시 반 쯤 되었을까. 자고 있는 나를 방해하는 초인종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을 때, 나는 단번에 이녀석이 온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다. 이건 짐작이 아니고 감이다. 날 선 감이 평소보다 격하게 발휘될 때가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참 기가막히게 짜증나는 타이밍이다. (*생리를 이렇게 묘사하면 공감이나 갈까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불쾌하기만 할 듯. 20171203)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 내가 자는 것보다?"


 나는 발로 툭 건드리면서 물었다. 녀석은 앉아서 전동 드라이버로 시계를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분해하고 있었다. 

 이 시계는 선물 받은 것이다. 전체 외관은 구리로 기계를 만든 듯한 매끈하고 무거운 느낌이다. 아래 부분이 좁은 오각형 모양에 반구가 위에 엎어져 있는 모양새이다. 앞쪽에는 한쪽면의 길이만한 지름의 둥근 시계판이 붙어 있었고, 그 판 앞으로 구리에 검은 도금을 한 바늘들이 꽂혀 있었다. 시계판에 붙어있는 로마숫자는 금속인데도 빛을 잃은 상태였다.

 몸통은 틈새가 나 있어서, 그 틈새로 크고 작은 톱니바퀴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시계가 작동할 때엔 그 톱니바퀴가 돌아가게 되는데, 그 톱니바퀴들도 재각각 그 속도가 다르며 움직임도 다르다. 끊김 없이 구르는 것도 있고, 째깍 소리에 멈추고 움직이는 녀석도 있다. 의외로 구경할 만한 모습이다. 그 외에도, 구리나 기타 합금으로 만들어진 나비나 꽃 모양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래, 뭐. 골동품같이 생겼다, 말 그대로.

 무언가 꼼지락 거리며 계속 분해하기만을 반복하던 그가 만족한 듯한 숨을 길게 내뱉으며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녀석의 발 앞으로 80cm 정도 되는 길이의 긴 시계 받침대가 구르다 멈춘채로 자리 해 있었다.

 녀석은 웃는다.


 "이게 중요해서라기보다, 네 거라서 그런거야."

 "내 물건 내가 아끼지 않는데, 왜 네가 그렇게 나서?"


 그러자 그가 다시 웃는다.


 "네 거잖아."





 그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상당히 얇고 날카로운 드라이버 세트가 튀어나왔다. 그 옆에는 비닐로 포장된 금색 톱니바퀴가 두 개 들어 있었다. 유독 반짝이는 그 모습에 나도 조금 흥미가 갔다. 나는 녀석 옆에 앉아서 그 톱니바퀴를 집었다. 허락 없이 함부로 비닐을 뜯어 톱니바퀴를 빼 내어도 녀석은 힐끗 하고 내 손을 보기만 할 뿐이었다. 

 톱니바퀴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문양들과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톱니바퀴의 사이즈는 생각보다 꽤 크다. 대충 500원짜리 동전 두개를 나열해 놓은 길이와 비슷한 것 같았다. 무게감도 상당해서 톱니바퀴의 존재감이 분명히 전해졌다. 나는 녀석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 이렇게 무거운 거야? 게다가 문양까지 새겨져 있어?"

 "원래 이 시계 안에 들어가는 부품이 다 그래. 이 공장이 꽤 오래전부터 손으로 세공을 해 왔거든. 그래서 그 세공된 모양도 매번 달라. 그런 곳이다보니, 보이지 않는 곳에다가도 본인들의 인장을 곧 잘 새겨두기도 해."


 이른바 정품을 만드는 장인의 솜씨쯤 되시겠다. 나는 같이 들어있는 또다른 부품도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는데, 역시 알아볼 수 없는 문양들이 톱니바퀴를 둘러싸고 있었다. 얼핏 보면 반지같기도 하다. 거인이 쓰는 반지. 정말로 두 톱니바퀴의 문양이 서로 달랐다. 


 "이거 얼마야, 그래서?"


 나는 물었다. 하지만 묻지 않았으면 마음이라도 편했을걸. 녀석은 조금 망설이는 듯 음 하며 생각하다가 결국 한마디 툭 던졌다.


 "의외로 얼마 안 해. 22만 7천원 정도였던가?"


 나는 한순간 가슴에서 올라오는 답답한 덩어리를 머리로 뿜어내면서, 도끼눈을 뜬 채 녀석의 등짝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아야! 하는 소리가 거실을 울렸지만, 상관 없다. 이 녀석은 진짜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맞아도 끄떡없는 녀석은 계속해서 이것 저것 건드리며 다시 재조립을 해 나갔다. 

 녀석이 말했다. 안경이 투명하게 빛났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이 안에는 태엽이나 톱니바퀴같은 걸로 구성되어 있어. 아마 나도 잘 모르는 이름을 가진 부품들도 진짜 복잡하게 뒤엉켜있기도 하고. 근데 신기한게 있어. 너 이거 너네 본가에 있을 때부터 이 집에 들인 지금까지 한번도 태엽 안 감았지? 그런데 멈춘건 정작 최근이었고. 게다가…."


 녀석은 잠시 손바닥에 들려있는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아까전에 빛나던 톱니바퀴와 같은 크기였지만, 빛을 잃은 탁한 몸체에 딱 봐도 상당히 깊이 패여 거의 끊어질 듯한 틈이 벌어져 있었다. 기계가 이러니 고장 나겠구나 하고, 기계를 모르는 나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녀석이 말했다.


 "이 시계가 멈춘건 감겨있던 태엽이 모두 풀려서가 아니라 이 톱니바퀴들이 깨져서 더이상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야.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어?"


 자연스럽게 내게 묻는 녀석의 질문에 밉상의 기운은 없었다. 단순하고 직접적인, 말 그대로 내게 의미를 아냐고 물은 것이다. 하지만 난 알 리 없다. 기계에 대해선 이해하고 있는 것이 전혀 없다. 다만 단순히 느껴지는건 하나 있다.


 "신기한거야?"


 그 말에 녀석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네가 말해서 신선하고 재밌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나는 그렇구나 하며 옆에서 조립이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리 옆으로 전동 드라이버를 내려놓은 녀석이 안경을 벗고는 덥지도 않은 서늘한 방 가운데에 앉아 얼굴에 살짝 맺힌 땀을 닦아냈다. 그리 땀도 안 나는 녀석이 흘리는 땀을 보는 것은 진귀하다. 때문에 녀석의 만족스러워 하는, 안경 없는 얼굴을 보는 것 또한 진귀하다.

 나는 잠시 넋 놓고 있다가 제정신을 차리고는 시계를 들어 받침대에 올리려는 녀석을 도왔다. 받침대를 세우고, 그 위에 시계를 올린 후에, 홈이 나 있는 곳에 볼트와 너트를 채우는 것으로 고정이 끝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녀석은 태엽 키를 달라고 했다. 그게 어딨냐고 묻는것이 나였고,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는것이 녀석이었다. 녀석은 내 목걸이를 가리켰다. 목걸이 끝에 무언가 매달려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거, 태엽 감을때 쓰는 그것과 닮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목걸이를 넘겨주었다. 금방 돌려준다면서 녀석은 태엽키를 들고는, 둥근 지붕 위에 나 있는 조그마한 구멍에 집어 넣어 돌리기 시작했다. 감기는 소리가 부드러웠다. 태엽 감기는 소리라는게, 좀 더 뚝 끊기고 따가운 소리 아니었던가.

 태엽 키를 뽑아내고 내게 건내는 녀석의 손을 잡고는 그 따스한 온기를 잠깐 느꼈다. 이렇게 부드러운 손으로 이렇게 딱딱한 고철이나 만지고 있다. 상처 하나 둘 쯤은 생길만 한데 그런 것도 없다. 손기술이 좋은건가.

 녀석은 반대편 손으로 시계바늘을 조절했다. 어느덧 시계 안에서는 똑딱 거리는 무거운 소리와, 부드럽게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기하게도, 고운 모래가 매우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려오는 소리가 그곳에서 함께 들려왔다. 

 그러고보니, 내가 이 시계를 처음봤던 때 - 벌써 몇년째인지. 내가 초등학교 때 봤으니까 - 이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아빠가 주로 계시는 책이 많은 방에 책상이 있는데, 그 책상 옆에 이 시계가 놓여 있었다. 사르르르 무언가 흐르는 소리가 시계에서 들려오는 것이 신기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소리를 좋아했기 때문에 나는 아빠께 이 시계를 나중에 달라고 했던 것 같다. 아빠는 돌아가시기 전에 이 시계를 내게 정말로 주셨다. 마지막 선물이었다.

 이후로 혼자 살기 위해 나온 나는 친구를 시켜서 이 무거운 시계를 가져오게 됐다. 그러고보니 이것 말고도 집에서 가져온 그리운 물건들이 몇개 더 있을 것이다.


 "정말 신기한 시계야, 이 녀석."


 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시계를 고쳐준 이 녀석에게 고마움을 느꼈고, 그것이 민망했다. 나는 손으로 뒷목을 쓸었다.


 "점심 먹고 가라?"

 "어? 그래도 돼?"


 녀석이 쳐다보았다. 녀석이 일어나면 나보다 키가 커서 내가 올려다보게 되는것이 분했지만, 분하다고 해서 기분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다.


 "뭐 어때. 오랜만이기도 하고."

 "하긴. 항상 우리집에서 먹으니까."


 물론 이 녀석이 좋다는 말은 아니다. 결코.

 나는 녀석에게 이것 저것 시켰다. 발로 정강이를 차면서 보챘다. 녀석은 웃으면서 차지 말라 말만 할 뿐이다. 나와 녀석은 부엌에 나란히 서서 점심을 준비했다. 공기가 부드럽게 흘렀다. 시계 소리도 부드럽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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