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미야 하루히의 단막(Picaresque)

2012. 4. 6. 01:31
반응형



 인생사 피카레스크.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고 나는 믿는다. 일반적으로 옴니버스라고 알고 있겠으나, 사실 용어 사용이 잘못된 것이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자주보는 애니메이션은 같은 인물이 다른 이야기로 매 화를 채워간다. 1화에서는 넘어지는 차이카, 2화에서는 물러터진 귤을 보고 화를 내는 카네, 3화에서는 이 둘에게 화를 내는 화투카가 나온다고 해도, 1화나 2화나 3화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어차피 '마니마가'라는 작품 내에서 언제나 등장한다. 1화에서도 세명은 기본으로 나와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인공이니까. 따라서 이것은 옴니버스가 아니라는 것이야.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샬록홈즈 시리즈도 피카레스크. 절대 옴니버스가 아니다.

 공기는 투명하게 맑아 깨질 듯 하면서도 너무도 높아서 손에 닿을리 없는 그 청명함에 고개를 들 생각 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오늘도 내 인생 최고의 운동코스인 오르막길을 오르며 등교한다. 매일이 피카레스크. 학교라는 무대에서, 같은 학교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같은 반 친구 사이에서, 어제와 비슷한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올라간다. 그런 식으로 생각에 빠져있다가 아아, 하고 정신을 차리면 나는 어느새 실내화로 갈아 신은 채 교실에 들어와 책상 앞에 점잖이 앉아있었다. 이건 대 미스테리야. 누가 좀 풀어주길 바라. 내 기억은 언제 어디서부터 날아간 거지?

 잠시 후, 그런 고민 할 새도 없이 언제나처럼 큰 소리를 내며 열리는 미닫이 문에 놀랄 리도 없는 어깨가 옆으로 돌아가고, 함께 고개도 옆으로 돌아가 시선을 옮겨 보노라면 언제나처럼 하늘같은 미소를 흩뿌리는 하루히가 당당히 걸어오고 있다. 뭐가 그리 좋은건지. 이 세상의 모든 우울은 날아가라는 듯한 함박미소였다.

 "기분 좋아 보이네."

 다시 몸을 원상태로 돌리며 맥 없이 인사 했다. 그러자 날아오는 말이 고작

 "나 10엔 주웠어!"

 와아. 오늘 좋은거 하나 알았다. 하루히를 기분 좋게 하려면 10엔 동전 하나만 있으면 되는구나. 집에 가는 길에 은행에 들러서 10엔짜리 100개 정도 바꿔 놓아야 겠다.

 "바보같이. 그런 10엔에는 아무 의미도 없어."
 "얼씨구. 그럼 주운 10엔에는 우주적 의미라도 있는거냐."
 "호들갑은. 그보다는, 좀 더 실용적인 의미가 들어있지!"

 소녀는 마치 자신이 주운 그 10엔에 아이패드를 살 수 있는 잠재력이 들어있는 것 처럼 말 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군. 그래. 바보네. 그럼 뭐야. 뭐가 실용적인데?

 "아직도 모르겠어, 바보 쿈? 잘 들어봐. 이게 10엔이었으니까 망정이지. 만약 1만엔이었다면 완전 대박이었을거야!"

 응. 그래. 그럴 수 있겠네. 그 운이라면 욕심이 나겠지만. 그치만 넌 오늘 결국 10엔을 주웠지. 

 "이해를 못 하네! 오늘의 이 행운이 바로 그 실용적인 의미란 말야!"

 손가락으로 머리 옆을 빙글 돌리며 날 노려보는 하루히. 뭐가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지만, 어차피 자기 머리를 돌리고 있으니까 나는 바보가 아니다.
 정리하자면 이거지? 10엔을 주웠든 1만엔을 주웠든 그 가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행운! 주울 수 있게 해 준 그 행운이다, 라는 것. 이것만 있다면 사실 1만엔은 고사하고 보잉747도 주울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확실히 실용적일 수 있겠다.

 "그거지, 그거! 역시 바보 쿈! 금새 성장했구나!"
 "그런데 말야."
 "뭐야. 초 치고 싶으면 제대로 쳐봐. 나의 이 이론을 부셔보라구!"

 이미 하루히 과학회에서 인증받은 이 이론이 무척이나 자신이 있나보다. 그렇군. 그렇다면 그 도전에 응해주지!!

 "좋은 것만 주우라는 법 있나?"

 이 질문에 대한 하루히의 반응은 적어도 0.1마이크로초 만큼은 놀라게 만들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움찔거리는 어깨는 동시에 하루히의 번뜩이는 두뇌의 연산을 의미하기도 했다. 곧장 하루히는 소리쳤다.

 "그러니까 운이지!"

순간 주변은 조용해졌다.




 오늘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뒤늦게 깨달았는데, 하루히가 소리치는 그 타이밍에 우리의 선장 오카베가 들어와 그 모습을 빠짐 없이 보고 있었다. 하필 그때 또 같은 반 친구들은 조용해졌지. 유독 크게 울린 어느 바보의 외침은 이후에도 많은 이들의 대화 거리가 되었다. 여튼간에 당사자는 결국 홈룸이 끝나고 하루히는 교무실로 끌려갔고, 억울함에 몸서리 치는 어느 단발머리 소녀는 원하지도 않는 한 글자 별명을 가진 어느 남자아이의 옷 소매를 잡아 당기며 

 "너도 일어나! 같이 떠들었잖아!"

 하고 땡깡을 썼으나.  그 말에 납득해서 일어날 리 없는 나는 그렇게 조용히 쿵쾅쿵쾅 멀어져 가는 하루히를 보며 비웃어 주었다. 행운이 딱 10엔짜리만 했네.



 위에서도 말했지만, 오늘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 되었다.
 내 인생의 피카레스크는 또 그렇게 시작 되었다.



------

하루히 세계관은
최고인 듯 해.



반응형
LIST

'문[文] > 단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식  (0) 2013.01.08
소녀와 소년 이야기.  (0) 2013.01.07
고딩 때 조사 했던, 지구 온난화와 빙하기  (0) 2011.03.16
시 계  (1) 2011.02.24

BELATED ARTICLES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