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 5

2019. 3. 18. 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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ː 거미. 증발.







새벽에 잠을 깨는 일은 적지 않다. 그렇다고 익숙한 것도 아니다.

오늘도 마찬가지겠다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아직 공기가 서늘한데도찬물이 마시고 싶었다이불 속에 파묻힌 채로 바닥에 누워있는 언니(호 아려(雅麗 품이 아름답고 고음) / 이름 라온)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

부엌 천장의 형광등을 켜고, 살금살금 걸어 소리 나지 않게 컵을 들고물 따라 마시고깊은 폐부 속에 뭉친 차가운 숨을 조용히 몰아쉬고.

그렇게 정신없이 일련의 행동들을 무의식적으로 해내고는지주는 그때서야 몽롱한 잠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전 3시 2.

컵을 싱크대 상판에 점잖이 올려는 놓지만심기는 차분하게 돌아오지 않았다그저 몽롱한 기분으로 흔들거리며 걷던잠에 빠져있던 어렴풋한 기운은 걷혀가고 있는 게 분명했는데좀처럼 현실감각에 돌아갈 수 없었다.

불안하고아려오는 감정.

지주는 이 기분을 잘 알고 있었고새삼스레 또 찾아온 거냐며 질색했다.

자리로 돌아가려는데언니가 깨어 있었다라온 아려의 시선이 어둠속에서 느껴져 왔다그녀는 반쯤 일어나 벽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지주가 언걸먹는 꿈이라도 꾼 거 아닌가 싶어.”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차가운 음색지주는 잠시 문 앞에 서 있었다역광이 된 지주는 새까맣다새까맣게 탄 나무덩이처럼 서 있었다꿈이 그를 태운 것인지그는 본래부터 타 있었던 것인지살아오면서 지금껏 타 있었던 것인지지주는 모른다.


정말이야아무리 꿈이라도 이런 법이 어디 있대요참 잔인해.”


아려가 누워있는 이부자리 위로 겹쳐 눕듯 쓰러졌다차가운 이불 표면이 바스라지고이내 언니의 체온이 그 속에서부터 살며시 느껴졌다지주가 두 팔을 언니의 등 뒤로 집어넣어 꼭 끌어안았다지금의 기분은 말하기 힘들다아직 구체적으로 무어라 말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뿌옇고잡히지 않았다짜증이 올라온다슬프려면 확실히 슬프던가.


내내 끙끙 앓다가 펑펑 우는데내가 깨워야 하나 고민을 수도 없이 했단다.”

얄궂어깨고 나서는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얼굴을 품에 문지르며 애처럼 굴었다라온 아씨의 손끝이 지주의 머릿결을 타고 차근차근 쓰다듬어 주었다쏟아지는 머리카락을 따라빗질하듯 쓸어주기도 했다.

서늘한 목 뒷덜미가 드러나고이내 시선은 지주의 가쁜 숨 몰아쉬는 등짝으로 옮겨져 갔다불규칙한 떨림이 더해져 있다지주는 흐느끼는 것 아니었을까얼굴을 보지 못해 아려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정작 깰 때는 참 점잖이도 일어났어그래서 네가 사람인가 싶었어.”

사람 아니죠나 같은 요괴.”

바보미안하게 만들고정말.”


지주는 품속에서 이불에 먹먹해진 웃음소리를 흘렸다그리고는 조금 더팔에 힘을 주어 아려 속으로 파고들어갔다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 건지느닷없이 숨을 삼키듯 흐느끼다가도 억지로 심호흡 하려는 듯 깊은 호흡을 쏟아내곤 했다긴 시간동안 계속 그렇게만 반복했다언니는 몇 번이고 생각을 되짚은 후 눈치껏 입을 열었다가이내 말하기를 그만두었다지주가 소곤거렸다.


얼굴이라도 떠오르면 몇 시간이고 흐놀다 지쳐 잠들 텐데어떤 놈의 면상인지를 알지 못하니까 마음 언저리만 간질거리고 괴롭고 쓸쓸하고정말 얄궂은 녀석이에요이번 꿈자리의 녀석은.”

그래그래남자 놈들은 하여튼 그렇지.”


같이 오라질 놈이라 한마디 해주니 지주의 기분도 여간 웃긴 것이 아니었다여전히 맥이 빠진 몸을 들어 올린 지주는 겨우 얼굴을 들어 올렸다입가는 미소를 머금었지만 눈가는 슬픔만 역력했다지주의 코끝은 언니의 코끝에 닿을 것만 같았다.


먼저 보낸 사람 중의 한 명이겠죠날 버린 사람이 아니라.”

당연하지널 버린 사람이 무슨 연유로 아는 척하려 하겠어네가 그리운 사람이 꿈속에 나타났을 거야.”

그런데 어쩜 이렇게도 안 떠오를 수가 있지아무런 인상도 못 남기고 사라졌어요.”


얼굴을 멀리 떨어뜨린 지주가 아려의 허벅지 위에 앉으며 말했다언니는 공기 새어 빠지는 듯한 웃음으로 적당히 받아주었다지주는 헝클어진 머리를 적당히 뒤로 넘기며 정리했다눈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제대로 울지도 못하게 하잖아가장 잔인해.”

누군지 몰라도 혼내줘야겠다.”

혼내줘요.”


지주가 배시시 웃었다아려의 가슴 한 구석이 씁쓸해졌다오래 사는 사람이란 결국 이런 식으로 과거와 연애한다이전 사람을 잊지 않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앞으로도 이런 꿈은 수도 없이 꿀 것이다.

얼굴 한 번이라도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분발 좀 하지 않을래라온이 속으로 그렇게 핀잔을 주었다두 손으로 지주를 가까이 끌어와 안아주었다.


그리움은 오래될수록 씁쓸해지나보다.”

새삼 느끼네요.”


그 후로는 오랜 시간동안초침 소리와 등 토닥이는 위로만 공기를 울렸다.

지주와 아려는 이번 아침만 조금 늦게 기상하기로 했다다시 잠들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니까또다시 같은 꿈을 꾸게 될지도 모르고같은 과거가같은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촛불 흔들리는 어두운 방 아래에서 누군가와 둘이서 마주보던 아주 오랜 기억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지만지주는 그 촛불이 사그라지던 기억에 맞춰 다시 잠들었다.


라온 아씨의 한숨이 새벽처럼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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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걸먹다 - 누군가로부터 해를 입는다. 해코지 당한다.

흐놀다 - 사무치게 그리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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