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 4

2017. 9. 2.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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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4


 


 강물처럼 흐르던 세월을 따라, 
지나간, 누군가의 말 한마디.


 "하루가 가고 밤이 오면"


 문득 들은 노래 가사에, 가슴이 놀란 듯이 떨렸다. 이 기분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나를 초라하게 만들어도 기쁜, 어떤 거대한 것을 만났을 때 오는 두려움이 가져오는 감정이었다.




  하루가 가고 밤이 오면.


 -그렇게 생각하기도 지쳐 잠들던 때가 과거에 얼마나 많았던가. 하루는 그러다가 문득 눈을 떴는데, 검푸른 새벽하늘이 검은 물결을 만들며 흐르는 걸 보고는 그 장엄함에 놀랄 때가 있었지. 처음에는 하늘이 꿈틀거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뱀의 꿈틀거림이라기보다는, 깊고 거대한 바다 같은 움직임이었다. 무수히 빛나는 별이 흐르는 거대하고 끝없는 바다 위로, 나는 땅에 매달려 있는 기분이 들었다. 몸이 느끼는 날 선 감각들에 신체 균형이 모두 망가지기라도 한 듯, 나는 세계가 뒤집어진 거미처럼 허우적거리며 미끄러졌다. 우습지. 그저 주저앉아서, 눈 안으로 가득 들어오는 별 하늘을 내려보듯 바라보았다.

 그런 하늘 아래에 유독 눈에 들어오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그런 하늘이 신기하지도 않은 것인지 그저 걷기만 했어. 오랫동안 지켜봤어. 그리고 알았지.

 새벽이 저 여자를 따라오고 있구나. 그럼 아마 저 여자를 따라 새벽이 가고 아침이 올 것이 틀림없구나.

 신기한 경험이었다. 미물에 지나지 않던 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이상했던, 머리가 무언가로 한가득 차 버린 듯 멍청해지게 만드는, 평소와는 다른 놀라운 세계가 하룻밤 사이에 되어 있었다. 어쩌면 원래부터 그럼 세상이었을 터. 그저 내가 발견을 하지 못했을 뿐.

 발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온몸이 흥분한 상태였던 것 같다. 나이도 지긋한데, 어린애처럼 소리치며 놀랄 뻔했다.

 목적 없이 걷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던 그 여자.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었지만 씩씩함도 하지 않았고, 느리지도 않았지만 빠르지도 않았다. 밤하늘 아래에 놓여있는 곧은 길을, 그녀는 산책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산책하는 여자가 밤하늘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다. 정말로? 내가 똑바로 이해한 것인가?

 무수하게 검은 주름이 진 밤하늘이, 길고 긴 물결이 흐르듯 그녀를 따라 흘렀다. 공기의 흐름에 따라, 거대하고 묵직한 움직임으로 천천히 이동하는 모습에 경외감을 느꼈다.

여덟 개 다리를 가진 존재였다면 볼 수도 없었을, 초점 조차 맞출 수 없었을 전혀 다른 차원의 신령이, 인간의 세계에는 아직도 이리나 아름답게 존재했단 말인가.

소녀의 몸을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검푸른 창공에 한가득 찬 그 이동에 압도되어 숨 쉬는 법도 잊어버리고 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 존재에게 익사 당할 뻔했다.



 유독 밤하늘이 그리울 때가 있다.


 은하수를 입은 새벽을 보고 싶은 것이다. 보름달로 길을 비춰주던 그것과 그 비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여자의 산책을 멀리서 다시 지켜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내 생애에 다시는 볼 수 없었던 자유로움이었다. 커다란 존재들이나 느낄듯한 자유로움. 방해할 벽이라고는 있을 리 없는 거대한 지위라도 가진 양 걸음걸이에 한 치의 망설임이나 주저함도 없던, 밤공기가 모두 자기의 것인 듯 상쾌해 보이는 표정.

 그는 어떤 생각을 하며 그 애완동물을 이끌었을까. 현실에 치이는 일상이 반복되어 괴로움이 쌓일 때마다 떠올랐다. 머릿속에 밤하늘을 담은 도피처가 생기고 만 것이다.


 그런 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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