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책 속 편지 - 퇴고 안함

2014. 6. 19.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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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을 정리하다가 찾게 된 책 한권이 있다. 상당히 얇은 종이가 내지로 사용 된 책인데, 전체 사이즈로 따지면 손바닥만한 크기이다. 어디서 많이 봤지만, 정확하게 무슨 책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던 나는 그 책을 망설임 없이 펼쳐 보았다. 뚝 떨어지는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와 나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오후 밝은 빛이 어두운 방 먼지를 빛냈다. 개인적으로, 이 무거운 분위기를 좋아한다.

 몇번 접혀있는 그 종이를 펼쳐 보았다.

 편지였다.



[ 이 편지가 당신에게 다다를 것이라 전 생각해요. 그렇지 않는다면, 전 이 편지를 몰래 버렸을테지요. 기한이 정해져 있어요. 이 편지를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이 가능한 시간이.

 안녕, 내 남자. 평안해야 해요, 당신은. 나같이 굴레에 속박되어 살지 말아주세요.

 우주가 어떻고 미래가 어떻고 하는건, 이 세상이 그런 미래를 생각하는건 정말이지 의미가 없어요. 우린 당장 앞도 알 수 없잖아요? 그저 추측과 추측, 그리고 그 위에 추측을 얹어가는, 그런 위태로운 상상들 뿐이죠. 하지만 그것이 워낙에 쌓이다 보니 이젠 왠만해서는 쓰러질 생각도 않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다행이에요. 그 덕분에 내가 당신께 편지를 몰래 보낼 수 있으니까요.

 관리 받는 것도 꽤 피곤하죠. 물론 여기서의 관리는 감시를 당한다는 뜻이에요. 감시당하는 와중에도 내 모습이 당신의 눈에 비춰질 날이 찾아올까 생각이 들어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노력하고 있어요. 이 갈 곳 없는 여자가, 그정도의 욕심은 부리고 있습니다. 내 희망은 너무도 하찮은데 절실해서요.


 인사는 이렇게 끝낼게요. 할 말이 너무 많아요.

 사랑하는 당신. 지금 당신이 서서 이 편지를 읽고 있는 곳은 일전에 내가 사형을 당했던 처형장 위층이에요. 나는 당신이 서 있는 바로 그 아래층의 천장에서 붕 뜬채로 죽었어요. ....아니, 사실은 아직 안 죽었어요. 하지만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현재'는 당신에게 있어서 아주 먼 과거에 지나지 않으니까, 난 이미 죽어있을 테니까, 아니, 진토로 돌아가 그 흔적도 없을테니 과거형으로 설명해도 되겠죠.

 아무튼 당신은 그곳에 있어선 안되요. 저번에 당신에게 그 방을 소개한 사람이 생각 나나요? 그 사람이 당신에게 어떤 조건으로 그 방을 사용하도록 소개했는지 기억나나요? 선뜻 계약했나요? 만약 그랬다면, 당신은 내 생각대로 움직인 것이고, 그것을 예상했던 내 편지도 읽었으니, 앞으로의 일어날 일을 반드시 설명해 주어야겠군요.

 그리 심각한 이야기는 아닐거에요. 그리 자세히 알지 못하니, 알려주고 싶어도 알려줄 수 없지만요. 하지만 당신이 내 말을 믿어준다면, 분명 내가 알지 못하는 '무척 무서운 일'은 없을테지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이용하기 위해 노리고 있어요. 당신은 세계를 꿈틀거리게 할 수도 있고, 세계를 침묵에 빠뜨릴 수도 있죠. 당신의 손에 한 사람이 웃거나 울 수 있음을, 당신은 절실히 알아야 해요. 당신은 그것을 배운 적이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얼마나 무겁고 날카로운 칼인지 당신이 알고있다면, 당신의 결정 하나 하나를 모두 조심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당신을 위태롭게 만드는 적을 스스로 만들게 될테니까요.

 예를 들어서, 음, 보세요. 당신의 선택에 저는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잖아요. 평화로운 세계가 제 시간 속에서는 나무가 도끼에 갈라지듯 사라졌어요. 당신의 선택에, 내 인생이 날아갔습니다. 그렇지만, 아, 사랑하는 그대, 그대는 너무도 현명한 행동을 한 것임을 나는 잘 압니다. 덕분에 그 나쁜 인간들의 테러가 실패로 돌아갔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의 그 선택의 힘이 이 인간들의 조직을 없앨 수 없었음은 안타까운 일이죠. 시기가 좋지 않았으니, 다음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제발 부탁이에요-, 그 방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도망쳐야 해요. 그렇지 않고서는, 당신은 그들에게 질 수 밖에 없어요. 그들은 영악하고, 남의 뒤를 들추기 좋아하니까요. 그들의 감각은 사냥개와 같아서,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드러나는 당신의 선량한 기운을 놓치지 않을거에요.

 당신의 생각은 모두 간파될 것이고, 당신의 시선은 모두 따라잡히고 말거에요.

 처음부터, 당신의 편은 당신의 적이 될 수 있으니까요.


 더 할 말이 많아요. 정말로, 정말로 더 할 말이 많아요. 하지만 내게 남은 여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편지를 쓰다가 들켜서 죽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어요. 내 마지막 끝자락에 고여있는 이성을 붙잡고 한마디만 더, 한마디만 더 적으려 해요.

 사랑해요. 꼭 당신과 다시 만나게 될 거에요. 언제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가 나누게 될 이야기의 내용이 바뀌겠죠.

 난 꼭 우리가 승리했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당신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요.

 그 어두운 무덤에서 당신을 기다릴게요.


 1432. 7. 18. 아렌즈 셰릴.

 ps. 솔직히 말해서, 그때 같이 갔던 레스토랑은 최악이었어요. 그냥 내 말 듣지 그랬어요.]



 뜻 모를 편지였다. 심각한 내용인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느낌은 연애편지가 가진 그 특유의 감각이었다. 너무 좋아 부풀어 오른, 예민한 감성의 감각이었다.

 나는 편지를 다 읽고는 그대로 감식반에게 전해 주었다. 감식반은 그것을 따로 보관해 두고 공기를 차단해 보관함에 넣었다. 다들 바쁘게 일 하는데, 나 혼자서 편지를 읽고 있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보기 안좋다.

 ...하지만, 이 편지를 쓴 여성과, 이곳에 매마른 백골로 남아있는 남성이 서로 아는 사이라면, 이 편지는 사건을 해결할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 백골은 이곳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눈가에 금이 가 있다. 아니, 충격에 의해 깨진건가? 나이 추정을 해 보면, 옷입은 모습이나 이것 저것 따져 봤을 때, 대략 오십대 후반에 들었을 것 같은데.

 가만. 그러고보니 이 곳은 사방이 잠겨 있었다. 햇빛이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도, 우리가 들어온 방 문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이곳에 날아다니는 먼지들은 단순한 먼지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 생각이 들자, 나는 잠깐 바깥에서 숨좀 고르지 않으면 분명 무언가를 게워낼 것이라는 직감에 사로잡혔다. 


1517년 4월 30일. 5월을 얼마 두지 않아 슬슬 옷의 두께를 신경 쓰게 될 계절이 다가왔다. 나는 올 해 첫 사건을 담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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