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몰 트라우마

2016. 1. 25.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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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 트라우마, 우리를 무너뜨리는 상처>



트라우마라는 말은 이제 보통명사처럼 쓰인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트라우마라는 말을 아는 사람은 소수였다. 이 단어를 사고로 인한 신체적 손상으로만 생각해 그저 '외상 外傷'이라고 번역한 책도 적지 않았다.

요즘은 트라우마라는 말만으로도 의미 전달이 잘 된다. 한국인의 언어세계에 확실한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트라우마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는 것 자체가 이 시대의 불행의 상징이라고 이야기한다. 상처가 일상화되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경우가 많으니 이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니겠나고 한다. 하지만 난 정신적인 상처가 지금과 달리 과거에는 적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과 두 세대 전에 이 땅에는 큰 전쟁이 있었고 그 전쟁에서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사람은 부지기수다. 성추행이나 폭행, 잔인한 폭력 역시 거의 일상적이었다. 전체적으로 심각한 트라우마의 경험은 줄어들고 있다.

오히려 트라우마가 널리 이야기되는 이유는 이제는 감정적인 상처에도 주목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가 발전했기 때문이다. 당장의 생존이 절실했을 때는 목숨이 붙어있다면, 그리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 것이 있으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로 우리는 스스로를 속였다. 하지만 기만이 늘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을 향해 발을 내딛자고 해도 허공으로 마음이 향하는 사람들이 있고, 살아있지만 죽은 것보다 더 괴로운 삶도 있다. 그들의 상처를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는 트라우마란 말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우리가 트라우마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역시 상처와는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각한 사고나 상실을 경험한 적은 없고 얼핏 보면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상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리를 절거나, 한쪽 팔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비가 오면 무릎이 울려 걷기가 불편하다거나, 어깨 깊숙한 곳에 통증 때문에 팔을 높이 들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눈에 띄지 않아 남은 볼 수 없지만 나에겐 분명 심각한 영향을 주는 상처들. 그런 상처를 가슴에 품은 사람들은 적지 않다.

이런 작은 상처가 스몰 트라우마다.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작은 상처들. 한번에 나를 짓이길 정도의 큰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지만 장기간에 걸쳐 일상적으로 영혼에 상처를 입은 경험이 스몰 트라우마다. 내게 중요한 상대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슬픔, 무시받은 경험, 그리고 외로움 속에 두려워하며 보낸 시간들이 작은 트라우마로 쌓인다. 스몰 트라우마는 장기간에 걸쳐 지속된다는 점, 그리고 일상 속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성격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누군가에게 이해받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누군가에게서 이해받아야 한다. 어린 시절엔 부모가 그 역할을 하고, 나이를 먹으면 스스로 그럴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나선다. 내게 특별한 사람을 만들어 위로받고 이해받으려 한다. 작은 지지가 절실하다. 그런데 상대가 그런 위로와 이해를 주지 않을 때 우리는 견디기 어렵다. 부모가 이해해주지 않는 아이, 부모가 늘 무시한 아이, 부모가 정서적으로 방치한 아이는 얻어 맞거나 성적 학대를 당하지 않아도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는다.

스몰 트라우마는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나의 회복력에 구멍을 낸다. 회복력이 무너진 우리들은 불안해지고, 불안에 빠진 자아는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 구석으로 숨어들어 고립되거나 뭔가에 의존하고 집착한다. 관계든, 술이든, 아니면 게임이든 현실을 바라보는 괴로움을 피하게 우리를 유도한다.

어떻게 우리는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결국은 이해받고 이해해주는 관계의 회복이다. 나를 이해해 줄 사람, 지지해주고 인정해줄 사람이 우리는 절실하고, 그러기 위해 나 역시 상대를 깊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해하는 것은 상대의 행동을 동의하는 것과는 다르다. 상대의 행동에 동의하지 못해도 우리는 상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다. 그러면서 얼마든지 동의하지 않음을 표현할 수 있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너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네 편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전할 수 있다.

물론 관계의 회복 그 이전에 먼저 필요한 것이 있다. 스스로에 대한 인정과 위로다. 내가 외롭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내가 상처받았음을 인정하는 것, 하지만 영원히 외롭고 상처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게 내가 내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고 일어서야 한다. 상처를 드러낸 채 타인을 만나서 이해받기란 쉽지 않다. 내 상처를 내 힘으로 어느 정도는 감싸야 한다. 때론 전문가의 도움이 잠시 필요할 수도 있다. 운이 좋다면 피를 흘리고 괴로워하는데도 다가와 자신을 내주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그것은 운이 좋아야 하고 우리는 그런 운이 없어도 살아내야 한다.

피부에 상처가 났다면 어른인 우리는 당장 연고를 찾고 밴드를 붙인다. 그런데 마음의 상처에는 속수무책이다. 이미 어른인데도 어른처럼 행동하기 어렵다. 아마도 상처를 다룰 수 없던 어린 시절부터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에 대해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돌보는지 보고 배우지 못해서다. 우리 마음은 여기저기 흉터다. 흉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지만 흉터의 결합조직은 우리 마음의 유연성을 자꾸만 떨어뜨린다. 그래서 오늘 또 상처 입고도 어쩔줄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머물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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