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文]
고등학교 때, 나는 공업고등학교의 교육에 맞는 과제를 받은 적이 있다. 화학공업과 소속이었던 나에게 주어진 것은 '환경 오염과 그로 인한 지구의 영향을 발표'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 시간짜리로. 과학이 좋았고 또 조사를 좋아했던 나로서는 그나마 재밌는 제안이었다. 이거 하면 1년 수행평가 만점이래. 우앜! 그런 심정으로 OK사인을 보냈던 것 같다. 하지만 알고보니 나 개인에게 시킨 일이 아니라 우리 조에게 시킨 것이었다. 요컨대 그거지. 분담하라는 거지. 사실 환경 오염이나 그에 따른 기상이변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광범위 하다. 때문에 분담하여 조사 또는 발표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치만 뭐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꽤 실망했다. 그냥, 혼자 해야 할 것을 나눠서 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사람을 아프게 하는 곳. 그녀는 그곳을 그리 불렀다. 하염없이 의욕 없는 눈빛만으로는 소녀의 생각을 단 10%도 읽을 수 없다는걸 잘 알고 있는 나는 일단 분위기의 흐름에 따라 물어보리고 했다. "아프게 한다니?" "무척 위험한 곳이야, 거긴." 시선을 아래로 꽂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의 손엔 어느새 다 먹고 앙상하게 남아있는 나무 막대기만 들려있었다. 나는 그 막대기를 받아서 가지고 있던 봉지에 담았다. 하지만 그러면서 소녀가 이을 다음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녀의 입술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소녀가 말했다. "...아니, 사실 사람만 아프게 하는 곳이라고 할 수는 없어. 그래. 거긴 땅을 아프게 해." "땅을?" "그것도 암덩어리처럼." 진지한 말과, 미소가 걸려 있지 않은 얼굴이 그녀의 ..
한가지 이야기 해 보자. 나는 지금9시 23분을 가리키고 있는 손목시계를 차고 있다. 사실 얼마짜리인지는 상관 없고, 그 값이 비싸다고 해서 내가 할 말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다. 물론, 내 시계는 엄청 싸다. 자 이제 이 시계를 차고 나는 시공간여행을 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X년 전 X월 X일, X시 XX분 XX초 XX 전의 x, y, z좌표를 가진 곳으로 이동할 것이다. 과거여행인 것이다. $ 자 이제 과거로 이동했다. 대기 속엔 석탄 냄새가 한가득. 퀴퀴하고 톡 쏘는 황 냄새가 심하다. 산업혁명 때인가? 아니 그건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동한건 분명해. 왜냐하면, 시각에 닿는 건축물들이 모두 고딕양식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내 시계를 보자. 과연 몇 시를 가리키고 있을까? '~' 당연히 9시..
분명한건, 난 시공간 여행을 하여 아이를 만났고, 그로 인한 결과가 바뀔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괜히 물리학을 공부하려 한게 아니다. 아니, 취미로 공부하려 한게 아니다. 아니, 알고싶었던 것이 아니다. 그렇지.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길을 걸었어야 할 내가, 오늘은 왠지 모르게 여기서 이렇게 시공간이 바뀐 '현실'을 살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이지? $ 시간이란 녀석은, 아무래도 세계라고 하는 게임의 전역변수쯤 되는 거창한 녀석이 아닌가보다. 사람마다 이야기가 다르고, 법칙이 다르고, 현상이 다르고, 사상이 다르다. 이것은 특정 시공간에서 겪게 된 배경의 데이터로 만들어진 인격쯤 되는 녀석이니까. 그러므로, 세계라는 거창한 곳에서 시간이라는 녀석은 어디서든 동일하게 정해지는 그런 공통적인 것이 ..
어김없이 우리는 벤치가 있는 공원으로 왔다. 그 무거운 짐들을 어서 집까지 가져가고 푹 쉬고 싶었지만, 이런 더운날 아이스크림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다시 마트에 들어가 나와 소녀의 몫까지 두개를 사 들고 나왔으니, 일단 먹고 들어가자는 대충대충벌레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대충대충벌레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다면 꼭 사전을 찾아보길. 절대 나오지 않는다. 어김없이 맑고 파란 소리를 뿜어대는 분수를 바라보며 나와 소녀는 아이스크림을 핥고 있었다. 하드로 사왔다. 오래 먹을 수 있으려나 싶어서. 사실 소프트아이스크림은 이런데서 사면 맛도 없는데다가, 너무 빨리 녹아서 정신없이 먹어야 하니까 그런 여유가 없는 것이 짜증난다. 물론 소녀는 소프트 쪽이 더 좋았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사 주는데 뭐라..
물건을 고르면서 곰곰히 생각했다. 도대체 소녀는 이 시원한 마트가 왜 위험하다고 말했던 것일까. 가장 보편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건, 이런 큰 마트에 대한 매우 안 좋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쯤이려나. 왜냐 하면, 사람이란 자고로 자신이 직접 목격한 충격적인 장면은 잊지 못하는 법이거든. 혹시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을까? …사실 이 소녀는 매우 청결한 아가씨여서, 이런 곳에서 틀어주는 에어컨에 있는 수 많은 세균과 닿고 싶지 않았을 수 있다. 이런 곳에서 틀어주는 에어컨을 마트 주인이 수시로 청소해 줄리도 없고, 청소해 준다고 해도 얼마나 깨끗하게 청소해 줄지도 모를 판이다. 갑자기 불신이 마구 피어오른다. 안돼. 사람은 서로 믿음으로 인해 성장하고 넓어지는 존재이다. 안돼, 안돼. ……. ..
길이 있어서 걸었다고 말 해봤자, 어차피 결정은 나 자신이 하는 것이기에 누구에게 하소연 하나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속에 꿍 하고 두고 있으면 그 숯은 어느새부터인가 불이 일기 시작해 심장을 온통 하얗게 태워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어두운 숲을 헤쳐가는 것 만큼 어려운 암담한 것도 없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곰의 숨소리가 가까워지는데도 불구하고 그저 조용히 숨죽이고 있어야 하는 것 만큼 미칠 경우도 없지만, 공통적으로, 미래가 보이지 않으면 사람은 미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언제나 앞을 바라보고 길이 어디를 도착하게 될지 제대로 확인 하고 걸을 필요가 있다. 분명 표지판은 존재하고, 지도도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길의 끝에 지옥이 있을지 땅이 있..
"어제는 갑자기 사라지는 마술을 선보였습니다." "오옹. 그게 마술이었구나~! 시끄러." 소녀가 어제의 변명을 툭 던졌고, 나도 툭 맞장구 쳐 주었다. 그리 심한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오늘도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모처럼 사귄 친구, 그리 쉽게 잊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때문에 오늘도 나란히 걷고 있다. 휘이 지나가버리는 승용차를 따라가는 바람들이 뜨거워 눈이 나른해지는 날씨인데, 소녀는 가벼운 옷차림과 어울리게 발걸음도 가벼워 보였다. 얼핏 본 소녀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음? 뭐지? 그리고 도착한 곳은 어제의 그 '큰 마트'. 무심코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혹시나 해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소녀가 없다. 그럼 당연히 거기 있겠지 하고 뒤를 ..
다음날 아침. 뭔가 어제의 마무리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소녀와 갑자기 헤어진 이후로 나는 내가 무언가 실수를 한건가, 아니면 그 아가씨가 역시나 전파라도 받은건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무의식중에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걸음이 멈춘 곳은 집 앞 현관이었고 신발을 벗으려 허리를 숙일때 왠지 모르게 비어있는 반대쪽 손이 어색했다. 아아, 놓고왔다. 부탄가스를 놓고와버렸다! 결국 허겁지겁 다시 돌아가서 부탄가스가 들어있는 봉투를 찾기에 바빴고, 그런 노력에게는 좋은 결과따위 개죽 쑤어먹으라는 듯 보이지 않았다. 물론 다시 사 올 수도 있었지만, 그때부터 어머니의 호출로 가게 일에 하루종일 바빴기 때문에 부탄가스는 새까맣게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일이 끝난 밤 10시 쯤에 다시 집 앞 현관에 다다랐을때 역시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