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cil 9

2015. 11. 16. 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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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러서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때가 있었어.



 …라고, 세실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은 뒤에 간단하게 식탁 위를 정리하고 차를 마시던 중이었다. 분위기 좋은 촛불로만 식탁 위를 비추었고, 우리는 그렇게 두시간을 이야기 한 것 같다. 이윽고 밤이 되어 창가 너머 밤 하늘이 별빛을 흔들고 있을 때, 차게 식은 차를 미뤄놓고 새로 잔에 따르려 할 때, 세실의 잔에도 따라 주고 있을 때에 그가 입을 열었던 것이다.

 나는 잠시 주전자를 들었다가, 다시 따랐다. 잠시 정신이 몽롱했다. 오늘 하루는 매우 바빠 지쳤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야, 그게?"

 "음. 그러니까……."


 그가 잠시 생각을 더듬었다. 문득 내뱉은 말이었던 것이리라.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말하고 싶었던 대로 말했던 것이리라. 달리 말하자면, 방금 떠오른 감정을 그대로 내게 표현한 것이리라. 나는 그 사실이 기분 좋았다.

 손으로 턱을 받치고 그가 말하는 것을 기다렸다. 다른 곳에 촛대는 없었다. 어둠에 삼켜진 이 방에 식탁 촛불이 고작이었다. 그 때문인지, 우리는 마치 어느 비좁고 어두운 곳에서 웅크리고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그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윗사람이 시키는 일을 반드시 해내야 하는 때가 있었어. 그걸 해내지 못하면 선량한 사람들도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되거든. 그래서 나는 그것을 성공시켜야만 했어. 무슨 일이었는지는 말해줄 수 없어서 미안해. 하지만 그게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게 되면 평화로운 네 일상이 송두리째 뿌리 뽑히고 말거야. 난 그럴수 없어.

 그 일을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어. 내가 유능했던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도 왜인지 윗사람은 내게 일을 시켰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의 이름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이다, 하면서. 사실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자신 있는 찻잎이다.


 "나는 할 수 밖에 없었어. 그러나 그 일을 해 나가면서도 나는 항상 불편했지. 하고싶지 않지만 해야만 하는 이유로 하고 있는 나 자신의 희생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저, 열심히 그 일을 했어. 불쾌한데도. 짜증이 올라오는데도."


 그가 그의 감정을 질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 어떤 때에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니, 사실 더글러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 난 지금 조금 당황한 상태이다. 그가 반쯤 풀린 눈으로 말을 두서없이 이어가고 있는 모습이 내게는 너무도 낯설고 놀라운 일이었다.


 "세실 피곤해?"

 "아, 응. 그러게."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에 취하면 이런 모습도 보여주는구나 싶다.

 일하고 늦게까지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했으니, 그럴만도 하다. 눈치없이 너무 오랫동안 잠을 못자게 한 것 같아 조금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솔직히, 세실의 새 모습을 보게 되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귀여워.

 나는 그를 일으켜 어깨동무를 하듯 걸치고 그를 바닥 매트에 눕혔다. 술에 취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술도 원래 안 마시고) 그의 정신은 몽롱한 상태라 하더라도 술취한 것과는 달랐다. 


 "나 안 자. 안 피곤해."


 칭얼거림은 과하게 늘어난 것 같지만. 무표정으로 이러시면 내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평소라면 얼굴이 달아올랐으리도 모른 이 상황을 그저 무덤덤하고도 능숙하게 처신하고 있었다. 

 애를 돌보는 기분이 들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옆에서 들어줄게. 일단 누워."


 나는 말했다. 상체를 들어 어떻게든 일어나려 했던 세실은 그 말을 듣고 금백색 머리를 흩날리며 털썩 드러누웠다. 듬직한 상체가 한껏 부풀다가 가라앉으면서 그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나는 잠시 일어나 식탁으로 걸어가 촛불을 껐다. 설거지는 내일 하면 되는거지 뭐.

 내가 다시 돌아와 옆에 앉는 것을 본 세실은 한쪽 팔을 자신의 이마에 갔다 댄 채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하기 싫다 하기 싫다 계속 되내이다 보면, 그게 계속 집착처럼 마음에 남아서 일 하는게 괴롭기만 한데, 그런 하기 싫은 일에서 물러나고싶은 마음을 포기해 버리니까, 모든걸 할 수 있겠더라. 맹목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하고 말았어. 아무 생각 없이. …그 일에 대한 내 생각은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결정도 고민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몸만 움직이는거야. …그런 생각으로 하다보면, 정말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더라고."


 점점 말 끝에 힘이 떨어져가는 그를 보고는 나도 침대에 누웠다. 그 위에서 침대 아래의 그를 보며 말을 마무리 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니까 소피아, 너는 누가 안 그러면 좋겠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잠들었다.

 꼬맹이같은 청년이 꼬마처럼 지쳐 잠들었다. 오늘은 고생이 많았으니까. 바빴고.

 오늘 더글러스에게 들은 말에 대해 나는 깊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너무 두서가 없어서, 요점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나더러 자신처럼 살지 말라 한 그 말 조차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이야기는 내일 다시 들어봐야지. 

 그리고 지금 하는 일도 맹목적으로 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고.


 그러나 일단 지금은, 맹목적으로 자 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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