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제희의 손에 장갑은 없었다. -1

2014. 8. 28.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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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는 일찍 지고 만다. 바람은 선선한것 처럼 느껴지는데 신기하게도 코트 속으로 차가움이 스며올라온다. 그다지 싼 코트도 아닌데 그렇다. 이상하다.

   그렇다. 지금은 겨울. 겨울바람이 불고 있다. 쓸쓸한 노을이 진 학교 정문 앞에 서서 제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희는 학생부의 일을 마무리 하고 나오니 오래 걸린다고 말 했고, 나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밖에서 기다리는 중이다. 그냥, 학교에 다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냥 그런 기분이다. 그래서 입김을 내 뿜으며 얼굴을 두툼한 목도리에 파묻은 채 서 있는 것이다.

   무릎까지 오는 두꺼운 코트. 그 코트의 주머니는 바람의 냉기를 막아주는데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손이 차면 배가 살살 아파오는 체질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그런 사람인지라, 장갑을 가져오지 못한 오늘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이 주머니가 좋다. 주머니는 깜빡해서 놓고 올 수 없으니까 좋다. 주머니 참 좋다.

   맞은편으로 지나가는 자전거가 너무도 차가워 보였다. 주기적으로 피어올라오는 하얀 입김이 앞을 가리지만 바람이 불면 금방 휘날려 사라지고 만다. 그냥 추울 뿐이다. 괜스레 외로워지거나 쓸쓸해지거나 하는 것도 없이, 그저 추울 뿐.

   나는 아마 별 생각 없이 학교 정문을 등지고 서 있는 것 같다.


   발이 시려서 조금 걸었다. 눈 밟히는 소리가 이어폰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음악을 듣고 있었고, 눈의 양도 얼마 없었다. 꽤나 많은 양이 내린 탓에 일요일에는 집 앞 마당에 쌓인 눈들을 밀어내느라 손과 발이 고생했었다. 다행히 그 다음날 하늘아래는 좋은 날씨였다. 길가에 살살 깔려있는 대부분 눈이 녹았고, 오늘은 날씨가 뭐 이리도 파랗게 차다. 코로 들이킨 공기에 콧속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오늘 아침에 학교에 오는데 멀리서 넘어지는 사람도 보았다. 미끄러운 곳이 숨어있는 듯하다.

   절묘하게 추운 바람이 바닥을 얼리는 겨울의 할 일은 언제나 느끼지만 충실도 하다. 사람들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할 일을 하고야 만다. 그래 해라, 해.


   “아, 춥다."

   나도 모르게 한마디 꺼냈다. 혼잣말이었다.

   "그러니까 같이 들어가자니까."

   그러자 제희가 말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희는 두 손을 싹싹 비비면서 호오 불고 있었다.

   "다 끝났냐?"

   "선생님이 춥다고 빨리 보내주셨어. 집에 빨리 가고 싶으셨대."

   "그래. 그렇게 또 선생으로서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셨군 그래."

   "아하핫! 겨울이 좋은 변명거리가 되니까."

   이야기의 진행은 자연스러웠다. 인사치레로 꺼내는 '미안, 오래 기다렸네.'와 같은 말은 오히려 우리 사이에서는 어색할 때나 나올 말이다. 제희는 두 손을 자신의 연한 베이지색 코트 주머니에 넣고는 내 옆으로 섰다. 가자는 뜻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나는 천천히 발을 옮겼다.

   겨울은 아직 내게 춥다. 새하얀 입김이, 나와 제희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노을을 등지며 우리는 걸었다.


   5시를 넘긴 하굣길은 혼자 걸을 때 의외로 고독감을 느끼기 쉽다. 노을이 번진 벽에 그림자가 만들어낸 경계선이 무척 분명할 때가 있다. 단지 나만 그리 느끼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이동한다. 아님 무표정으로 길을 걸으며 서로 스쳐 지나가고 만다. 음악을 들으며 주변을 무표정의 눈으로 두리번거리는 사람은 때때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없다. 문자적으로 그렇다. 서로 자신들의 시선 속의 세상에서 홀로 걸어가게 된다.

   그럼 난 어떻지? 사실 좀 이상한 포지션에 있는 중이라고 본다. 지금의 나는 제희와 함께 걷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나는 ‘우리’라고 할 만큼 애틋한 사람이 없다. ‘우리’라는 말이 애틋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사실, 내가 그것을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거야, 내가 청소년이고, 그렇기에 느끼는 감정이라 한다면, 처음에 말했던 ‘하굣길의 고독감’은 이 애틋함이라는 녀석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이다. 결혼 한 사람도 묵묵히 땅을 쳐다보며 걸어가는 걸 자주 보니까. ……위험한 관계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아무튼, 이 길을 걷는 건 나 혼자 뿐이다. 누군가가 지나가고 앞서간다 해도, 그건 그저 풍경일 뿐이다. ‘우리’로 묶어서, 이 곳에 함께 있다고는 말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하굣길을 친구들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대부분 모두 집으로 가거나 학원에 가는 것. 함께 놀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고독을 풀 방법을 찾은 것. 그러나, 나에게 그런 방법 따윈, 전혀 없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데는 아마 음악의 힘이 클 것이다. 나는 이어폰을 뺐다. 

   “귀가 아프네.”

   “너 그렇게 오랫동안 끼고 있으면 귀에 곰팡이 핀다?”

   “안 펴. 무슨 말도 안 되는…….”

   “습기 차니까 곰팡이 펴.”

   “……아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런 이유로 진짜 곰팡이가 피겠느냐만 서도, 왠지 아주 그럴듯하게 들렸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눈은 사람이 밟지 않게 되는 가장자리에 조금 남아 있을 뿐, 걷는데 지장이 없어 보일정도로 인도는 깨끗했다. 길을 걸으며 일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요즘 새삼 느끼기도 한다. 추운 겨울은 언제나 마음을 고독하게 만든다. 눈이 내려 감성적이 되기까지 한다면, 정말 우울증 걸리기 딱 좋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화를 나눌 대상이 없을 경우고.

   나는 제희와 걸으면서 잡담을 나누었다. 피식 웃거나 어이없다는 듯이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이야기 한다. 질문하고, 비아냥거리다가, 설명하고, 반대하고. 이러저러 이야기를 하다가도 화제는 금방 바뀌기도 한다. 흐름은 격변하고, 이야기는 술술 나온다.

   “일전에, 하늘에서 뭔가 반짝이는 것이 슝 하고 지나갔었어. 밤에.”

   제희가 말했다. 난 앞만 보면서 되물었다.

   “슝 하고?”

   “응. …아니 사실은, 아냐.”

   “뭐라는 거야.”

   노려봤다. 내 쪽을 쳐다볼 리 없는 제희.

   “천천히 지나갔어. 저 하늘에서.”

   “그 불빛이 깜빡깜빡 하던?”

   “어떻게 알아?”

   “그거 비행기잖아.”

   한숨 쉬며 걷는 속도를 냈다. 뒤에서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다급해 지는 것이 들린다. 나는 잠깐 동안 유지한 그 속도를 줄이며 다시 그녀와 걸음을 맞추었다. 

   “내, 내가 몰랐을까봐?”

   옆에서 제희가 다급하게 말했다. 진지한 표정이라서 더 안쓰러웠다. 어떻게 하지. 이 친구 정말 몰랐던 건 아닐까 하고 조금 진지하게 걱정했다.

   “그래. 알았겠지.”

   “그런데 왜 말투는 못 믿는 말투야?”

   제희 말이 맞아서 난 할 말이 없었다. 이러저러 수습이 안 되는 상황이다. 제희의 이미지가 수습이 안 된다는 뜻에서 말이다.


   제희는 내게 고독을 주는 존재가 아니다. 그녀와의 대화는 편하다. 계산이나 정리를 할 필요 없이, 그저 들리는 대로 그리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녀에게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즉, 나는 그녀가 편했다.

   여성이고 남성이고를 떠나서,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조금만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어느 다른 사람에게 쉽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다. 그렇게 자신을 보호한다. 그러니, 자신을 보호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무방비하게 친한 사이가 과연 인생에서 몇 명이나 있겠는가. 많으면 많은 대로 위험할 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제희라는 것이 걱정 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말하지만, 나와 제희는 각별하다. 매우 친하다. 그런 제희가 걱정 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조금 지나친 오지랖과 조금 과한 비아냥거림의 능력치뿐이다. 그 외에는 없다. 제희는 정말 좋은 사람임이 틀림없다. 아, 한 가지 더. 비행기랑 별똥별을 구분 못하는 정도의 경한 지식까지 추가하자. 나머지는 괜찮다. 제희는 좋은 여자이다.

   이런 재미있는 친구와 함께 다니는데 고독이라니. 말도 안 된다. 제희는 자신만의 존재감이 분명하다. 이 존재감은 분명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채워줄 것이다.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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